[영겁의 새벽] 제151화 - 남김

제151화 「남김」

1. 12미터

발사한 지 서른아흐레가 지났다.

명호가 아침 점검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25줄짜리 종이의 복사본이었고, 열넷째 줄에 연필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 줄에는 한 달 전에 명호가 직접 적어 넣은 네 글자가 있었다.

근거 없음.

밑줄 옆에 다른 글씨가 적혀 있었다.

찾았습니다.

3번 밸브를 보던 관제사였다. 명호가 고개를 들자 그 사람이 벌써 자료실 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팔에 누런 봉투를 하나 끼고 있었다.

“어디서 나왔습니까.”

“자료실 서쪽 셋째 칸입니다. 1차 발사대 도면 원본이 통에 말린 채로 있었습니다.”

봉투에서 나온 것은 도면 한 장이었다. 종이가 누렇게 삭아서 접힌 자리가 갈라져 있었다.

관제사가 도면 한쪽 귀퉁이를 짚었다.

“여기 철탑이 하나 있습니다. 풍속계 지지대입니다. 높이가 적혀 있습니다.”

12미터였다.

명호는 그 숫자를 한참 봤다.

25줄 중 열넷째 줄은 지상풍을 잰다는 규정이었다. 언제 재고 몇 번 재고 어느 높이에서 재는지가 적혀 있었다. 높이는 12미터였고, 명호는 한 달 전에 그 12가 어디서 온 값인지를 찾지 못했다.

“그냥 그 탑 높이였던 겁니까.”

“네. 그 자리에 서 있던 철탑이 12미터였습니다.”

“기상 쪽 표준은 10미터인데요.”

“표준을 보고 세운 게 아니라 세워 놓고 그 높이에서 잰 겁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아무도 안 바꿨습니다.”

명호는 도면을 책상에 펴 놓고 옆에 지금 기체의 제원표를 놓았다.

1차 발사대에 세우던 기체는 높이가 28미터였다. 지금 기체는 62미터였다.

“바람이 높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명호가 말했다. 관제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땅에 가까울수록 느립니다. 땅이 붙잡으니까요. 위로 갈수록 빨라집니다.”

명호가 계산기를 두드렸다. 개활지에서 쓰는 지수를 넣었다.

“12미터에서 22가 나오면 60미터에서는 스물일곱쯤입니다.”

“이십이랑 스물일곱이면 다른 숫자입니다.”

“다릅니다.”

명호는 잠깐 말을 멈췄다.

“우리는 12미터에서 잰 값을 한계랑 비교해 왔습니다. 그런데 한계는 28미터짜리 기체를 세워 놓고 만든 값입니다. 지금 기체는 그 2배가 넘습니다. 몸통 위쪽이 받는 바람은 우리가 재는 자리보다 셉니다.”

“그럼 열넷째 줄을 고쳐야 합니까.”

명호가 고개를 저었다.

“재는 자리는 못 옮깁니다. 탑을 새로 세우려면 1년입니다.”

“그럼요.”

“재는 자리를 옮기는 게 아니라, 재고 나서 뭘 하는지를 적는 겁니다.”

명호가 열넷째 줄 아래에 2줄을 새로 적었다.

첫 줄은 12미터에서 잰 값을 기체 높이로 환산하는 식이었다. 둘째 줄은 그 식에 쓰는 지수가 발사장 지형에 따라 다르며, 이 발사장 값은 해안 개활지 기준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이 12미터는 1차 발사대 풍속탑 높이에서 온 값이다. 탑이 헐리면 이 근거도 같이 없어진다.

관제사가 그 줄을 보고 물었다.

“그것까지 적습니까.”

“근거에도 사는 동안이 있습니다.”

명호가 연필을 놓았다.

“오늘 제가 근거를 적어 놨는데, 10년 뒤에 저 탑이 없어지고 나면 이 줄은 또 물려받은 값이 됩니다. 그때 사람이 이 밑줄을 보고 아, 이건 탑이 있을 때 얘기구나 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때는 저희가 없을 텐데요.”

“없으니까 적는 겁니다.”

명호는 종이를 한 장 더 복사해서 다른 팀 앞으로 보냈다. 지난주에 그 팀에서 이 종이를 달라고 했었다. 명호는 그때 25줄만 보내지 않고 근거 칸까지 통째로 보냈다.

받은 쪽에서 처음 물어본 것은 열넷째 줄이었다.

여기 왜 근거 없음이라고 적혀 있느냐고 물었다.

한 달 만에 그 칸이 찼다.

2. 백에 하나

관제실 화면에는 124번째 정렬 결과가 떠 있었다.

81장은 매일 아침 조금씩 어긋나 있었고 매일 아침 조금씩 되돌려졌다. 한 달 동안 그 일이 31번 있었다.

“격자 오차 0.05입니다.”

인턴이 읽었다. 유도 담당이 화면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한 달 전에 0.07이었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응. 그런데 이게 오늘 한 일 때문에 내려간 건 아니야.”

팀장이 옆 화면을 켰다. 거울 한 장의 자세 각도가 표로 떠 있었다.

전부 조금씩 기울어 있었다. 일 도가 안 되는 각이었다.

“오늘부터 이렇게 세워 놨어.”

“일부러 기울인 겁니까.”

“응.”

인턴은 그 표를 한참 봤다. 한 달 전에 팀장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거울은 얇고 넓어서 빛에 밀린다고 했다. 제 일을 하느라 제자리를 잃는다고 했다.

“빛이 미는 걸 막는 게 아니라……”

인턴이 말끝을 흐렸다. 팀장이 받아 줬다.

“미는 걸 쓰는 거야.”

빛은 거울을 정면으로만 밀지 않는다. 거울이 조금 기울어 있으면 반사된 빛이 옆으로 나가고, 나간 만큼 거울은 반대쪽으로 밀린다. 그 밀리는 방향을 고르는 것이 각도다.

“벌어지는 쪽으로 밀리던 걸 모이는 쪽으로 밀리게 돌려놨어.”

“그럼 이제 안 벌어집니까.”

“두 가지가 벌어지게 하는데, 하나는 빛이고 하나는 지구야.”

지구는 완전한 공이 아니다. 적도 쪽이 조금 부풀어 있어서 그 부푼 몫이 도는 것들의 궤도면을 매일 조금씩 돌려 놓는다.

“빛은 쓸 수 있어. 지구는 못 써. 못 쓰는 건 매일 맞추는 수밖에 없어.”

인턴이 표를 다시 봤다.

“기울여 놓으면 빛이 덜 모이지 않습니까.”

“덜 모여.”

“얼마나 덜 모입니까.”

“백에 하나.”

팀장이 손가락으로 화면 아래쪽 숫자를 짚었다.

“백에 하나를 내주고 열두 해를 벌었어.”

원래는 벌어지는 몫을 배에 실린 것을 조금씩 뿜어서 되돌려 놓게 되어 있었다. 실어 보낸 것은 다 쓰면 끝나는 것이었고, 그렇게 쓰면 일곱 해쯤 갈 계산이었다.

이제 그걸 거의 안 쓰게 됐다. 열아홉 해가 나왔다.

“열두 해 더 쓰는 게 백분의 일보다 큽니까.”

“백분의 일은 오늘 손해고 열두 해는 나중 이야기야. 그런데 나중이 열두 해면 그건 나중이 아니야.”

뿜는 걸 안 쓰는 대신 매일 아침 각도를 다시 계산해야 했다. 그 계산은 이제 사람이 하지 않고 배가 스스로 했다. 어제 정한 규칙대로 매일 새벽에 값을 넣고 조금씩 돌려 놓았다.

인턴이 물었다.

“그럼 사람은 뭘 합니까.”

“규칙이 맞는지를 봐.”

팀장이 흐름표를 폈다.

“규칙을 만든다는 건 판단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야. 미리 해 두는 거야. 미리 한 판단은 언젠가 틀려. 안 틀리는 판단이면 그건 판단이 아니라 사실이고.”

지상 송전 누계는 2568시간이었다. 107일이었다.

한 달 전에 얕게 파여 있던 골은 그래프에서 사라진 채 그대로였다.

다음 발사는 다섯 달 뒤였다.

흐름표의 오늘 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 한 일: 빛에 밀리는 쪽을 바꿈. 내일 할 일: 어제와 같은지 봄.

3. 40건에 하나

동현은 11권째 노트의 마지막 장을 쓰고 있었다.

10년 동안 쓴 흐름표였다. 어느 부서에서 무엇이 왔고 어디로 갔고 며칠 걸렸는지가 하루도 안 빠지고 적혀 있었다. 첫 권은 표지가 닳아서 색이 없었다.

마지막 장에 적을 것이 별로 없었다.

한 달치 통계만 적었다. 여섯 부서에서 241건이 왔고 그중 여섯 건이 잘못 처리됐다. 40건에 하나였다.

한 달 전에는 20건에 하나였다.

부장이 지나가다 그 숫자를 봤다.

“줄었네.”

“줄었습니다.”

“자네가 다시 보기 시작했나.”

“아닙니다. 저는 한 달 동안 한 건도 안 고쳤습니다.”

동현이 노트를 덮으면서 말했다.

“제가 하면 안 틀립니다. 그런데 안 틀리는 건 거기서 안 줄어듭니다. 저 사람들은 지금도 조금씩 덜 틀립니다. 덜 틀리는 건 계속 줄어듭니다.”

“언제까지 줄어드는데.”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20건에 하나에서 40건에 하나까지 한 달 걸렸습니다.”

동현은 새 노트를 사지 않았다.

대신 부서 공용 문서에 한 장을 새로 만들었다. 흐름표에 적던 것 중에 남들이 봐야 하는 것만 골라 옮겼다. 옮기고 나니 11권이 한 장 반이 됐다.

“나머지는 뭐였는데.”

부장이 물었다.

“제가 그날 뭘 걱정했는지였습니다.”

동현은 노트 11권을 상자에 넣었다. 버릴까 하고 세 번 들었다 놨다가 결국 캐비닛 아래 칸에 넣었다. 여섯 부서 파일철을 나눠 보내고 남은 자리였다.

상자 표지에 이름은 안 적었다. 연도만 적었다.

“자네 이름은 왜 안 적어.”

“이름이 적혀 있으면 저한테 물어보러 옵니다. 연도만 적혀 있으면 그냥 열어 봅니다.”

오후에 동현은 새로 온 사람 자리를 지나갔다.

책상 위에 손수건이 펴져 있었다. 접히지 않은 채로 서류 밑에 반쯤 깔려 있었다. 꽃잎 5장이 보였다.

“왜 펴 놨어요.”

“접지 말라고 하셔서요.”

그 사람이 서류에서 눈을 안 떼고 대답했다.

“접으면 다시 안 펴게 된다고 하셨잖아요.”

동현은 10년 동안 그 손수건을 서랍 안에 접어 두었었다. 접어 둔 10년 동안 한 번도 펴지 않았다. 편 것은 한 달 전이 처음이었다.

동현은 아무 말도 안 하고 돌아섰다.

그 사람에게 언제 그걸 다음 사람한테 주라는 말은 안 했다. 그건 그 사람이 정할 일이었다.

4. 무제

무대는 200석짜리 홀이었다.

소율은 사흘 전에 프로그램 원고를 받았다. 곡 제목 칸이 비어 있었다.

“제목 안 정하셨으면 무제로 넣을까요.”

담당자가 물었다. 소율은 그 말을 듣고 잠깐 생각했다.

“무제는 제목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제목을 안 붙였다는 제목이에요.”

“그럼요?”

“한 바퀴요.”

소율이 말했다. 담당자가 되물었다.

“한 바퀴요? 그냥 한 바퀴요?”

“네.”

곡은 11마디였고 마지막 마디가 세 번째 마디로 돌아갔다. 한 바퀴 도는 데 50초쯤 걸렸다. 연습실에서는 세 바퀴를 돌기로 정해 놨었다.

무대 리허설은 오전에 했다.

첫 소절을 치고 소율은 손을 멈췄다.

“소리가 안 없어져요.”

무대 감독이 객석 뒤에서 대답했다.

“여기 잔향이 1.6초쯤 됩니다.”

연습실은 사방이 두껍고 좁아서 소리가 벽에 먹혔다. 잔향이 0.4초쯤이었다. 홀은 천장이 높고 벽이 단단해서 소리가 몇 번 더 돌다가 사라졌다.

같은 곡인데 소리가 겹쳤다.

“손을 더 빨리 떼야겠네요.”

소율이 말했다. 감독이 웃었다.

“다들 그러시더라고요. 여기서는 덜 치고 더 기다리시면 됩니다.”

저녁 무대에서 소율은 두 번째 순서였다.

앉아서 손을 건반 위에 올려놓고 잠깐 있었다. 한 달 전에 연습실에서 처음 남 앞에서 쳤을 때는 첫 바퀴에 손이 떨렸다. 오늘은 안 떨렸다.

여덟째 마디에서 손가락 하나가 옆 건반을 스쳤다.

소율은 안 멈췄다.

전에는 그런 자리에서 멈췄다. 멈추고 다시 시작했다. 오늘은 지나갔고, 지나가고 나니 그 자리는 이미 뒤에 있었다.

두 바퀴째가 끝나갈 때 소율은 세 바퀴째를 안 돌기로 했다.

홀이 소리를 붙잡고 있어서 한 바퀴가 연습실에서보다 길게 들렸다. 두 바퀴가 연습실의 세 바퀴만큼 됐다.

마지막 음을 치고 손을 뗐다.

소리가 2초쯤 더 있다가 없어졌다.

끝나고 대기실로 가는 복도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었다. 연습실 옆방 사람이었다.

“오셨어요.”

“들으러 왔죠.”

그 사람이 말했다.

“이번엔 다 들렸어요.”

“어떠셨어요.”

“벽 너머로 들을 때는 어디서 멈추는지가 들렸거든요. 오늘은 안 멈추니까 어디가 어려운 데였는지를 모르겠어요.”

소율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게 무대예요.”

집에 와서 소율은 종이를 폈다. 11마디가 적힌 종이였다. 아래쪽에 줄이 그어진 2마디가 있고 그 아래에 다시 적힌 것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더 적을 게 없었다.

소율은 새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첫 줄에 2마디를 적었다. 오늘 홀에서 마지막 음이 2초쯤 남아 있는 동안 들린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게 몇 번째 마디가 될지 몰랐다.

5. 나흘

화분 2개는 창가에 한 뼘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62번째 날이었다.

진우가 물뿌리개를 들고 두 화분 앞에 앉았다. 김지수가 옆에서 잎을 들여다봤다.

“어느 쪽이 늦게 난 쪽인지 아시겠어요?”

김지수가 물었다. 진우가 두 화분을 번갈아 봤다.

“오른쪽입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기억하고 있으니까 압니다. 보고는 모르겠습니다.”

한 달 전만 해도 차이가 났다. 손가락 한 마디쯤이었다. 지금은 손톱만도 안 됐다.

“나흘이 없어진 겁니까.”

“안 없어졌어요. 안 보이게 된 거예요.”

김지수가 손끝으로 두 줄기를 나란히 짚었다.

“처음에는 하루가 크거든요. 하루에 몸이 배로 늘어요. 그럴 때 나흘이면 16배 차이예요. 그런데 어느 만큼 자라고 나면 흙에 있는 걸 다 못 먹어요. 거기서부터는 둘 다 천천히 자라요. 앞선 쪽이 먼저 느려지니까 뒤엣것이 붙어요.”

“그럼 결국 같아집니까.”

“키는 같아져요. 나흘은 그대로 있어요. 저 화분 흙 밑에는 나흘 먼저 난 뿌리랑 나흘 늦게 난 뿌리가 그대로 있어요.”

진우는 물을 절반씩 나눠 줬다. 다 주고 나서 오른쪽 화분에만 조금 더 줬다.

“왜 더 주세요?”

“이쪽이 볕을 늦게 받습니다. 오후에 저쪽 잎이 그늘을 집니다.”

김지수가 진우를 봤다.

“이제 안 물어보시네요.”

“물어볼 게 줄었습니다.”

“두 달 보셨으니까요.”

김지수가 왼쪽 화분 줄기 끝을 가리켰다.

거기 잎겨드랑이에 도톰한 것이 하나 맺혀 있었다. 초록이었고 아직 아무 색도 아니었다.

“뭡니까.”

“꽃봉오리예요.”

진우가 몸을 숙여서 봤다.

“이쪽이 이겼네요.”

“먼저 피는 거지 이기는 게 아니에요.”

김지수가 말했다.

“꽃은 큰 게 피는 게 아니에요. 낮이 짧아지면 펴요. 지금 해가 매일 2분씩 짧아지고 있거든요. 저쪽도 곧 맺힐 거예요.”

“언제 핍니까.”

“며칠 걸려요.”

김지수가 물뿌리개를 받아 들면서 덧붙였다.

“안 세셔도 돼요. 오는 거니까요.”

6. 20분

수요일이었다.

진우는 6시 반에 나가려다가 6시에 나갔다. 지난달에는 30분 서 있는 게 힘들어서 늦게 나갔는데 오늘은 그냥 일찍 나가고 싶었다.

6시 40분에 도착했다.

7시가 됐는데 현수가 안 왔다. 7시 10분에 문자가 왔다.

늦어요 20분만요.

진우는 답을 보냈다.

천천히 와.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5년 동안 진우는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벽에 붙은 종이를 보고 그날 지나갈 시각을 세면서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안 오는 것을 기다리는 기다림이었다.

오늘 기다린 20분은 그것과 달랐다.

올 것을 아는 채로 기다리는 20분이었다. 그 20분 동안 진우는 아무것도 안 셌다.

현수가 7시 25분에 들어왔다.

“죄송해요. 회의가 안 끝나서.”

“괜찮아. 나 일찍 왔어.”

“뭐 드실래요.”

“갈비탕.”

진우가 바로 대답했다. 현수가 잠깐 진우를 봤다.

“지난번에는 며칠 걸리셨잖아요.”

“그때는 오래 안 생각해 봐서 그랬어.”

“이번엔요?”

“이번엔 그동안 생각해 놨어.”

현수가 웃었다. 진우는 아들이 웃는 걸 오랜만에 봤다. 정확히는 오랜만이 아니었다. 지난달에도 웃었는데 그때는 진우가 그걸 보고 있지 않았다.

밥을 먹는 동안 현수가 회사 얘기를 했다. 진우는 들었다. 반쯤은 무슨 말인지 몰랐고 모르는 채로 들었다.

나올 때 현수가 말했다.

“다음 달엔 제가 아버지 집으로 갈까요.”

진우는 젓가락을 내려놓던 손을 잠깐 멈췄다.

5년 동안 그 집에 온 사람은 김지수뿐이었다.

“그래.”

“뭐 해 드릴까요. 제가 요즘 좀 해요.”

“아무거나.”

말해 놓고 진우는 그 말을 고쳤다.

“아니. 밥이랑 국이면 돼.”

집에 돌아와서 진우는 부엌 불을 켰다.

벽에 종이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앞면에 시각이 4개 적혀 있었고 맨 아래에 다섯 글자가 있었다.

매달 수요일.

진우는 그 종이를 보다가 이상한 걸 알아챘다.

오늘 아침에 이 종이를 안 보고 나갔다.

5년 동안 하루도 안 빼먹고 아침에 이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은 그냥 지나쳤고, 지나친 줄도 모르고 하루를 다 살았다.

진우는 종이 귀퉁이를 손끝으로 잡았다.

다음 달에는 아들이 이 부엌에 들어온다. 들어오면 이 종이를 볼 것이다.

뗄까 하다가 그만뒀다.

뒷면은 아직 비어 있었다. 진우는 그 면을 오늘도 안 뒤집었다.

다만 종이 아래를 조금 들었을 때, 지난달보다 손이 덜 무거웠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적어 두면 언젠가 누가 채운다. 채우는 사람은 적은 사람이 아니고, 채워지는 날도 적은 날이 아니다. 한 달이 걸릴 수도 있고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 다만 지운 자리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남겨 둔 자리에만 누가 온다.

근거에도 사는 동안이 있다. 오늘 찾아낸 근거는 오늘의 것들이 그대로 서 있는 동안만 근거다. 그러니 근거를 적을 때는 그 근거가 언제까지인지도 같이 적어야 한다. 없으니까 적는 것이고, 없을 것을 알기 때문에 적는 것이다.

미는 것을 늘 막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밀리는 방향은 고를 수 있다. 백에 하나를 내주고 열두 해를 벌 수 있다면 그것은 손해가 아니다. 다만 고를 수 있는 것과 고를 수 없는 것을 갈라 두어야 한다. 고를 수 없는 것은 매일 맞추는 수밖에 없고, 매일 맞추는 일에는 끝이 없다.

먼저 난 것과 늦게 난 것의 차이는 없어지지 않는다. 안 보이게 될 뿐이다. 흙 밑에는 나흘이 그대로 있고, 겉으로는 같은 키가 되어 있다. 사람은 대개 겉을 보고 같아졌다고 하는데, 같아진 것이 아니라 따라잡을 만큼 오래 자란 것이다.

81장은 오늘도 조금 벌어졌고 오늘도 조금 맞춰졌다.

내일도 그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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