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의 새벽] 제148화 - 되짚음

제148화 「되짚음」
1. 요약본
발사가 끝나고 6시간이 지났는데 통제실에는 아직 18명이 앉아 있었다.
팀장이 두 번 저녁을 먹고 오라고 했고 두 번 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화면에는 이제 로켓이 없었다. 대신 숫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인턴이 명호 옆에 와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항목 이름이 위에서 아래로 끝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게 다 뭡니까.”
“기록.”
명호가 말했다.
“오늘 낮에 우리가 본 건 240개야. 지금 내려오는 건 만 8000개.”
인턴이 눈을 크게 떴다.
“낮에는 왜 240개만 봤습니까.”
“보낼 수가 없어서.”
명호가 의자를 조금 뒤로 밀었다.
“올라가는 동안 배가 지상에 보낼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어. 만 8000개를 전부 실시간으로 보내면 선이 막혀. 그래서 솎아서 보내. 중요한 것만, 그것도 초에 몇 번씩만.”
“그럼 나머지는요.”
“배 안에 남아 있어. 배 안 기록장치는 초에 몇천 번씩 적어. 그게 지금 내려오는 거고, 수신국 네 군데가 각각 받은 걸 시각을 기준으로 이어 붙이는 중이야. 겹치는 구간이 있어서 그걸 맞춰야 한 줄이 돼.”
인턴이 잠깐 말이 없다가 물었다.
“그럼 오늘 낮에 통과라고 했던 건 뭡니까.”
“통과 맞아.”
명호가 말했다.
“근데 통과했다는 것만 알아. 얼마나 통과했는지는 아직 몰라.”
밤 11시가 넘어서 이어 붙이기가 끝났다. 명호는 자기 자리에 앉은 채로 화면 하나를 띄워 놓고 한참을 보았다. 낮에 보던 그래프와 같은 그래프인데 선이 달랐다. 낮의 선은 매끄러웠고 지금 선은 잔털이 잔뜩 나 있었다.
같은 비행이었다. 낮에는 요약본을 본 것이었다.
2. 잘된 걸 보는 자리
다음 날 아침 9시, 비행 후 검토가 시작됐다.
책상 위에 종이가 한 장씩 놓여 있었다. 어제 나눠 준 발사 당일 시각표와 같은 크기의 종이였고, 이번에는 시각 대신 항목 이름이 적혀 있었다.
팀장이 앞에 서서 첫 마디를 했다.
“오늘은 잘된 걸 봅니다.”
몇 명이 고개를 들었다.
“안 된 걸 보는 자리가 아니라요?”
유도 담당이 물었다.
“안 된 건 어제 낮에 이미 손을 들었어.”
팀장이 말했다.
“안 된 건 알아서 소리를 내. 문제는 잘된 거야. 잘된 건 조용해. 그리고 결과지에는 아슬아슬하게 통과한 거랑 넉넉하게 통과한 게 똑같이 통과라고 찍혀.”
팀장이 화면에 그래프를 하나 띄웠다. 어제 T 플러스 72초의 굽힘 하중이었다.
“예측 대비 104퍼센트. 한계의 81퍼센트. 어제 이거 보고 다들 좋아했지.”
“좋은 거 아닙니까.”
젊은 관제사가 말했다. 3번 밸브 별표를 처음 올렸던 그 관제사였다.
“좋아.”
팀장이 말했다.
“근데 왜 좋은지를 알아야 다음에도 좋을 수 있어.”
유도 담당이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 몇 장을 돌렸다. 밤새 돌린 계산이라고 했다.
“어제 새벽에 잰 값 68을 안 넣고, 예보값 65로 만든 경로 그대로 갔다고 가정하고 다시 계산했습니다.”
숫자가 하나 적혀 있었다.
92퍼센트.
방 안이 조용해졌다.
“구십이면 통과인데요.”
젊은 관제사가 말했다.
“통과지.”
팀장이 말했다.
“근데 92는 다음번에 바람이 셋만 더 세면 못 가는 숫자야. 81은 셋이 아니라 열이 세도 가고.”
팀장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우리가 어제 한 건 통과가 아니라 여유를 만든 거야. 통과는 그날 하루를 지나가게 해 주는 거고, 여유는 다음번을 만들어 주는 거야. 그런데 결과지에는 둘 다 통과라고만 나와. 그래서 이 자리가 있는 거야.”
유도 담당이 조금 웃었다.
“일곱째 줄은 결국 안 걸렸네요.”
벽에 붙어 있던 23줄짜리 종이 이야기였다. 그제 그 줄을 일흔에서 일흔다섯으로 넓히자는 말이 나왔고 팀장이 안 고친다고 했었다.
“안 걸린 게 아니야.”
팀장이 말했다.
“그 줄이 있어서 새벽 3시에 기구를 세 번 띄웠어. 세 번 안 띄웠으면 우리한테는 예보값밖에 없었고, 예보값으로 만든 경로로 갔으면 오늘 아침에 우리는 92를 보면서 통과했다고 말하고 있었겠지. 저 줄이 안 걸린 게 아니라, 저 줄이 68을 재게 만든 거야.”
젊은 관제사가 손을 들었다.
“제 항목 말입니다.”
어제 낮에 그 관제사는 자기가 보던 값이 일 단과 함께 떨어져 나가는 걸 봤다. 5시간 40분 동안 그 값을 본 사람은 그 하나였고, 값은 세상에서 없어졌다.
팀장이 화면을 바꿨다.
“여기 있어.”
그래프가 하나 떠 있었다. 3번 밸브 몸통 온도였고, 낮에 보던 것보다 훨씬 촘촘했다.
“일 단은 기록장치가 같이 떨어졌어. 지금 바다 밑에 있고 못 건져.”
팀장이 그래프를 손끝으로 짚었다.
“근데 떨어지기 전까지 계속 보냈어. 그걸 지상에서 받아 놨고, 우리가 낮에 화면에 띄운 게 그중에 240개였을 뿐이야. 안 띄운 게 없어진 게 아니야. 떨어져 나간 건 물건이고, 값은 안 떨어져.”
관제사가 화면 앞으로 갔다. 11시 6분에 밸브를 잠깐 열어 흘려보낸 자리에서 선이 위로 꺾여 있었다. 0.9도가 올라갔다. 그리고 상승 중에 다시 0.3도가 떨어졌다가 천천히 올라왔다.
“하한까지 얼마 남았습니까.”
“0.6.”
팀장이 말했다.
관제사가 한참 화면을 보다가 말했다.
“다음 비행에는 이걸 별표 말고 정규 항목으로 올리겠습니다.”
“올려.”
팀장이 말했다.
“이번에는 자네가 봐서 알았지만, 다음번에는 자네가 없어도 누가 보게 만들어야지.”
기상 담당관이 마지막으로 자기 몫을 보고했다. 티 플러스 36초와 52초에 아무 일도 없었다. 지상에 깔아 둔 전기장 측정기 26대의 그날 최대값은 미터당 0.4킬로볼트였고 한계는 1이었다.
“우리가 안 맞은 걸 안 게 아닙니다.”
담당관이 말했다.
“맞을 조건이 아니었던 걸 안 겁니다. 그건 다릅니다.”
3. 힘을 빼는 일
오후에 명호는 아직 할 일이 하나 남았다는 걸 알았다.
궤도에 올라간 이 단은 화물을 놓고 나서도 계속 돌고 있었다. 임무는 끝났는데 물건은 남아 있었다.
“저건 이제 안 봐도 되는 거 아닙니까.”
인턴이 물었다.
“마지막 하나가 남았어.”
명호가 말했다.
“남은 걸 빼야 돼.”
“뭘 뺍니까.”
“연료.”
명호가 화면을 가리켰다. 탱크 압력과 배터리 전압이 나란히 떠 있었다.
“다 쓰고 남은 게 조금 있어. 계획은 1.8퍼센트였는데 실측은 2.3이야. 고압 탱크에는 아직 압이 걸려 있고 배터리에도 전기가 남아 있어.”
“남아 있으면 좋은 거 아닙니까.”
“가만두면 언젠가 터져.”
명호가 말했다.
“저건 앞으로 몇 년을 저기서 돌아. 낮에는 햇빛에 익고 밤에는 얼어. 그걸 몇천 번 반복하면 어딘가 실금이 가. 그때 안에 압이 남아 있으면 그 자리에서 조용히 터지고, 그러면 파편이 수백 개가 돼. 지금 저 위에 떠다니는 조각들 중에 꽤 많은 게 다 쓴 로켓이 나중에 혼자 터진 거야.”
명호가 절차를 하나씩 실행했다. 남은 추진제를 우주로 뿜어냈다. 고압 탱크의 밸브를 열어 압을 뺐다. 배터리를 방전 회로에 물렸다.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다 쓴 건 가만두면 조용한 게 아니야.”
명호가 말했다.
“힘이 남은 채로 있으면 언젠가 혼자 터져. 우리가 저것한테 해 줄 마지막 일이 힘을 다 빼 주는 거고, 그러고 나면 이제 안 봐도 돼. 안 봐도 되게 만드는 게 오늘 일이야.”
발사대 쪽에서도 사람이 올라갔다. 화염 구덩이의 콘크리트를 두드려 보고 물 배관을 잠그고 열에 그을린 자리를 표시했다. 어제 아침까지 20명이 매달려 있던 자리에 오늘은 셋이 올라가서 두드리고 적고 내려왔다.
발사대는 비어 있었고, 비어 있는 것이 정상이었다.
4. 이틀째
같은 시각, 지구 저궤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에이틀라스 관제실의 흐름표는 어제와 오늘이 거의 같았다. 격자 87차, 오차 0.1밀리미터. 송전 누적 1680시간, 70일째. 거울은 80장 그대로였고, 어제 비워 둔 자리도 그대로 비어 있었다.
새것은 고리보다 120킬로미터 아래에서 이틀째 돌고 있었다.
“오늘은 뭘 합니까.”
젊은 관제사가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해.”
팀장이 말했다.
“근데 정확히 아무것도 안 하려면 오늘 볼 게 있어.”
팀장이 화면에 각도 하나를 띄웠다. 새것이 고리보다 얼마나 앞서 나갔는지를 보여 주는 숫자였다.
“어제 하루에 14도 앞섰고 오늘까지 27도. 남은 게 13도 조금 넘어.”
“내일 딱 맞겠네요.”
“맞을 거야. 근데 맞을 때 올리기 시작하면 늦어.”
관제사가 고개를 들었다.
“왜요.”
“올라가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팀장이 손가락으로 원을 2개 그렸다.
“낮은 데서 높은 데로 옮기는 건 순간이 아니야. 한 번 밀고 반 바퀴를 돌아야 반대편에서 높이가 맞아. 45분쯤 걸려. 그 45분 동안에도 저건 계속 앞서 나가. 그러니까 딱 맞았을 때 시작하면 도착할 때는 지나쳐 있어.”
“지나치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뒤로 못 가.”
팀장이 말했다.
“뒤로 가려면 다시 낮아졌다가 몇 바퀴를 더 돌아야 돼. 며칠 더 걸려. 그러니까 도착할 때 맞추는 게 아니라 떠날 때 맞춰야 돼. 도착해서 맞추려고 하면 그때는 이미 늦은 거야.”
팀장이 시각을 하나 계산해서 화면에 적었다. 내일 새벽 4시 22분이었다.
“오늘 우리가 한 일이 저거야. 떠날 시각 정하기.”
관제사가 흐름표 앞에서 잠깐 망설였다.
“오늘 한 일에 뭐라고 씁니까. 어제는 낮은 데로 보냄이었는데 오늘은 진짜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안 한 게 오늘 한 일이야.”
팀장이 말했다.
“그리고 내일 몇 시 몇 분에 시작할지를 오늘 정했잖아. 그게 제일 큰 일이야.”
관제사가 적었다.
오늘 한 일: 떠날 시각을 정함. 아직 아무 데도 안 감.
5. 스무닷새
물 주는 일은 오늘 진우 차례였다.
두 번째 화분 앞에서 진우가 물뿌리개를 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제 그 자리에서 흙이 아주 조금 도톰했었다. 그림자가 없으면 보이지도 않을 만큼이었고, 진우가 파 보면 안다고 했다가 스스로 웃으면서 안 판다고 했던 자리였다.
거기가 갈라져 있었다.
굽은 목 하나가 흙을 등으로 밀고 반쯤 나와 있었다. 첫 번째 싹이 스무하루 만에 나왔던 것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김지수가 들어오다가 진우의 등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났네요.”
“났습니다.”
진우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어제 선생님이 내일 보면 안다고 하셨죠.”
“오늘이 아는 날이죠.”
김지수가 옆에 와서 같이 들여다보았다.
“나흘 늦었네요.”
진우가 말했다.
“스무하루하고 스무닷새면 나흘 차이입니다. 같은 봉지에서 나온 씨앗인데 왜 나흘이나 차이가 납니까.”
“껍질이 달라서요.”
김지수가 말했다.
“같은 어미가 만든 씨앗인데 껍질 두께가 제각각이에요.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요. 두꺼운 껍질은 물이 스며드는 데 며칠이 더 걸리고, 그 며칠이 통째로 늦게 깨어나는 시간이 돼요.”
“일부러요.”
“네.”
김지수가 흙 위를 손끝으로 훑었다.
“다 같은 날 나면 그날 밤에 서리가 한 번 오는 걸로 전부 죽어요. 그래서 어미가 자기 새끼들 껍질을 일부러 다르게 만들어 놔요. 몇은 빨리, 몇은 늦게. 늦은 쪽이 못난 게 아니라 늦으라고 만들어진 거예요.”
진우가 물을 조금 주었다. 첫 번째 화분에도 똑같이 주었다.
“안 나는 씨앗도 있죠.”
“있죠.”
김지수가 말했다.
“근데 안 나는 씨앗이랑 늦게 나는 씨앗은 나기 전까지 똑같이 생겼어요. 겉으로는 구분이 안 돼요. 그래서 정하면 안 되는 거예요. 정하는 순간부터는 안 보게 되고, 안 보면 나와도 몰라요.”
진우가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한참 앉아 있다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아들이랑 점심을 먹었습니다.”
“어떠셨어요.”
“별 얘기 안 했습니다.”
진우가 말했다.
“국밥집에 앉아서 걔가 회사 얘기를 했고 저는 듣기만 했습니다. 무슨 팀이 어떻고 누가 어떻고. 5년 만에 마주 앉았는데 한 시간 동안 회사 얘기만 들었습니다.”
“그것도 얘기죠.”
“그런데요.”
진우가 손끝으로 무릎을 문질렀다.
“나올 때 걔가 이러더군요. 다음 주에 시간 되세요.”
김지수가 진우를 보았다.
“다음 달이 아니고요.”
“다음 달이 아니고 다음 주였습니다.”
진우가 말했다.
“차 타고 오면서 그 말을 세 번 되뇌었습니다. 다음 달이랑 다음 주는 다르잖습니까.”
“다르죠.”
김지수가 말했다.
진우가 잠깐 말을 멈췄다가 조금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께 산소에서 제가 약 먹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소리 내서요. 그때 걔가 몇 걸음 뒤에 있었는데,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물어보고 싶으세요.”
“아니요.”
진우가 말했다.
“들었으면 들은 거고, 못 들었으면 다음에 제가 말하면 되죠. 다음이 있으니까요.”
부엌 벽에는 아직 그 종이가 붙어 있었다. 앞면에는 2줄과 시각 3개가 적혀 있었고 시각 3개는 그저께 아침에 다 지나갔다. 뒷면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진우는 그 종이를 떼지 않았다.
6. 안 찾음
소율은 여드레째였다.
어제 처음으로 아홉째 마디를 적었고, 오늘은 그 종이를 앞에 놓고 처음부터 쳐 보았다. 앞의 2마디를 뗀 곡이었다. 세 번째 마디부터 시작해서 아홉째까지, 7마디였다.
치고 나서 소율이 손을 무릎에 놓았다.
“적어 놓으니까 좀 못해졌어요.”
친구가 웃었다.
“왜요.”
“적을 수 있는 게 정해져 있어서요.”
소율이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높이랑 길이는 적히는데, 세게 치는 결이나 손이 닿는 순간이 아주 조금 앞이나 뒤로 밀리는 건 안 적혀요. 기호가 없어요. 그래서 적힌 대로 치면 제가 그날 친 것보다 조금씩 덜해요.”
“그럼 안 적는 게 나은 거 아니에요.”
“아니요.”
소율이 고개를 저었다.
“못해진 채로 있는 거랑 잘한 채로 없어지는 거는 다르죠. 안 적었으면 잘한 채로 없어졌을 거예요.”
소율이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쳤다. 이번에는 끝까지 치고 나서 손을 안 뗐다.
“열째 마디가 안 와요.”
친구가 물었다.
“오늘 안 오면요.”
“안 오는 게 아니라.”
소율이 아홉째 마디의 마지막 음을 한 번 더 짚었다.
“열째가 오는 게 아니고 첫째로 돌아가고 싶어 해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여기서 다시 세 번째 마디로 붙어요. 그러면 곡이 닫혀요.”
“그럼 다 된 거네요.”
“확인해 봐야죠.”
소율이 종이를 덮었다.
“오늘은 한 번 그렇게 느낀 거고, 내일도 그러면 그때 적어요.”
같은 날, 동현은 10년 만에 근무가 아닌 날을 보냈다.
6시 반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갈 데가 없었다. 씻고 나와서 앉아 있다가 휴대전화를 봤다. 아무것도 안 와 있었다. 10시에 한 번 더 봤고 2시에 한 번 더 봤다. 세 번 다 아무것도 안 와 있었다.
동현은 오후에 은행에 갔다가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평일 낮의 시장은 처음이었다.
주머니에는 손수건이 접힌 채로 들어 있었다. 어제 서랍에서 꺼내서 넣었고 하루 종일 펴지 않았다.
저녁 6시가 조금 넘어서 전화가 울렸다. 부장이었다.
동현은 전화를 받기 전에 잠깐 숨을 들이켰다. 10년 동안 이 시각의 회사 전화는 늘 무언가가 안 되는 전화였다.
“자네 우산 두고 갔어.”
부장이 말했다.
“월요일에 챙겨.”
동현이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을 웃었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회사 전화를 받고 웃은 날이었다.
동현은 집에 와서 책상 앞에 앉았다가 흐름표를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쓸 게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늘은 쓸 일이 아니었다.
되짚는 일은 이미 끝난 일을 다시 하는 것이 아니다. 끝난 일에서 다음에 쓸 것을 꺼내는 일이다. 통과했다는 것과 얼마나 통과했는지는 다른 값이고, 앞의 것은 그날 하루를 지나가게 해 주지만 다음 날을 만들어 주는 것은 언제나 뒤의 것이다. 그래서 잘된 날일수록 오래 앉아 있어야 한다. 안 된 것은 알아서 소리를 내지만 잘된 것은 조용히 지나가고, 조용히 지나간 것은 다음번에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는다.
다 쓴 것에는 아직 힘이 남아 있다. 남은 힘을 빼 주지 않으면 그것은 오래 조용히 있다가 어느 날 혼자 터진다. 끝내는 일은 손을 떼는 일이 아니라 다시 안 봐도 되게 만들어 놓는 일이다.
늦게 오는 것과 안 오는 것은 오기 전까지 똑같이 생겼다. 그래서 정하면 안 된다. 정하는 순간부터는 보지 않게 되고, 보지 않으면 와도 모른다. 스무하루에 나온 것과 스무닷새에 나온 것은 나흘이 다를 뿐이고, 그 나흘은 늦은 것이 아니라 늦으라고 만들어진 것이다.
80장이 비워 둔 자리는 오늘도 비어 있었다.
내일이 사흘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