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기] 제54화 - 벰

제54화 「벰」
1. 십 초
아침에 책상 위 종이가 없었다.
재혁이 어제 저녁에 놓아둔 것이었다. 무게 둘을 알겠다는 것과, 152를 다음 시즌 목록에 값까지 적어 두겠다는 것과, 그러면 내년 사람이 셋째 점을 낸다는 것이었다.
종이는 없고 말은 없었다. 안 듣는 날 일곱째였다.
재혁은 야장에 적었다.
「10월 2일. 수요일. 깊이 712 → 718 예정. 종이 없어짐. 말 없음. 말은 안 왔고 종이는 갔음. 간 것도 움직인 것임.」
캠프 철수까지 아흐레였다.
7시 40분에 드릴을 내려보냈다. 조립체 184킬로그램이었다. 바늘이 내려앉은 것은 8시 11분이었고 31분이 걸렸다. 어제보다 5분 길었다. 6미터 깊어졌으니 그만큼이었다.
깎기는 8시 50분에 끝났다. 걸린 무게는 154에서 170 사이를 오갔다.
윈치를 되감아 드릴을 케이블에 온전히 매달았다. 재혁은 초침을 보면서 손을 눈금자 쪽에 대고 있었다.
10초에 읽었다.
715.11.
30초에 읽었다.
715.13.
차가 0.02였다.
재혁은 야장 여백에 네 수를 나란히 적었다.
「10초 715.11 / 30초 715.13 / (어제) 3분·30분에서 각각 0.03.」
10초에서 30초는 세 배였다. 세 배에 0.02가 늘었다. 여섯 배에 0.03, 열 배에 0.03이었다.
그러면 아래로도 마찬가지였다. 1초 값은 715.09쯤일 것이고, 0.1초 값은 715.07쯤일 것이었다. 자릿수를 하나 내리면 0.02가 빠지는데, 자릿수는 아무리 내려도 0이 되지 않았다.
재혁은 한참 있다가 적었다.
「0초 값이 없음. 온전히 매단 순간의 눈금이라는 것은 없음. 케이블이 늘기 시작한 시각은 있는데 늘기 전의 눈금은 없음.
그러면 지금까지 「매단 시각」이라고 적어 온 것은 시작한 시각임. 시작한 시각의 값은 못 잼. 잰 것은 다 시작한 다음의 값임.」
그 줄을 적고 나서 재혁은 어제 적은 30초 얘기를 다시 봤다. 이유 없이 고른 30초였고 스물여덟 점을 내고 나서 이유가 생긴 30초였다.
오늘 그 30초가 한 가지 더 되었다. 0초를 못 재니까 어딘가는 골라야 했다. 30초는 고른 자리였다.
「고른 자리임. 옳은 자리가 아님. 옳은 자리가 없음.」
벌어짐 같은 줄 점은 스물아홉째였다. 값은 0.09였다. 부족분은 오늘 0.11이어서 누계가 7.61이 되었다. 헛돎은 2번이 한 번, 1.5초였다.
점검표 회신 기한은 내일이었다.
2. 삼백예순다섯
은재는 5시 50분에 방에 들어갔다.
여느 날은 6시 10분이었다. 오늘은 절단이어서 톱대에 성에를 떨고 바닥을 쓸어 놓는 일이 먼저 있었고, 그걸 하고 나서 걷으면 늦었다.
은재는 접시를 들고 서서 손바닥만큼을 짐작했다.
「598.」
10초로 걷어서 저울에 올렸다.
자는 595부터였다. 오늘 값은 자 아래였다.
어제 것은 595여서 끝에 걸렸고, 오늘 것은 아예 밖이었다. 은재는 그 줄을 적다가 연필을 멈췄다.
“선생님.”
“네.”
“이 점을 줄에 넣어도 돼요?”
경옥이 톱대 쪽에서 돌아봤다.
“왜요.”
“앞 열세 점은 다 6시 10분쯤이었어요. 오늘은 5시 50분이고요.”
“방은 같아요.”
“방은 같은데요, 제가 다르잖아요. 20분 일찍 일어났고 손도 안 풀렸고요.”
경옥이 장갑을 벗고 야장을 받아 들었다.
앞 열세 줄에는 시각이 적혀 있었다. 은재가 처음부터 적어 온 칸이었다. 6시 8분, 6시 12분, 6시 10분, 6시 9분이 열세 번 이어졌고 오늘이 5시 50분이었다.
“적혀 있으니까 넣어요.”
경옥이 말했다.
“넣고요?”
“넣고, 옆에 20분 이르다고 적어요. 그러면 나중에 빼고 볼 수도 있고 넣고 볼 수도 있어요.”
“어느 쪽이 맞아요?”
“몰라요. 그건 점이 스무 개쯤 되면 이른 날들끼리 모아 보면 알아요. 오늘은 한 개예요.”
은재는 그렇게 적었다.
「10월 2일. 열넷째 점. 592. 짐작 598. 차 6 아래. 자(595~613) 밖. 시각 5시 50분 — 앞 열세 점보다 20분 이름. 절단 준비 때문임. 줄에 넣음. 이른 날 표시 함. 이른 날이 모이면 따로 봄.」
기록계 두 대는 6시 30분에 읽었다. 차는 −0.07이었다.
어제 −0.09였고 부호는 그대로였다. 은재는 값을 적고, 자리 시험 칸에는 적지 않았다.
“오늘은 못 써요.”
은재가 먼저 말했다.
“네.”
“문을 열 거고, 톱이 돌 거고요.”
톱날은 쇠였고 얼음을 지나가면 마찰로 열이 났다. 하루에 통 셋을 자르면 그 열이 다 방 안에 남았다. 사람도 셋이 들어와 있을 것이었다.
“오늘 값은 방 값이 아니에요. 일한 값이에요.”
경옥이 말했다.
“그러면 버려요?”
“아니요. 적어요. 일한 날 표에 적어요. 그 표도 나중에 쓸 데가 있어요. 자르는 날에 방이 얼마나 오르는지는 아무도 안 적어 놨어요.”
은재는 칸을 하나 만들었다. 「일한 날」이라고 적고, 그 아래 오늘 것을 옮겼다.
10월 3일은 뒷정리였고 10월 4일은 방을 가만히 두는 날이었다. 자리 시험 둘째 점은 10월 5일이었다.
재운 날이 오늘로 365일째였다.
수송팀 칸에는 「수요일. 물었음. 아직.」이라고 적었다. 기다린 날 열두째였다.
3. 일 점 육오
첫 통은 7시 40분에 톱대에 올렸다.
실금이 많은 통 셋을 먼저 자르기로 한 계획서 그대로였다. 톱날은 어제 갈아 두었다. 절단선은 어제 저녁에 그어 두었다.
경옥이 톱을 켜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했다.
“위아래 표시 봤어요?”
“봤어요. 두 번 봤어요.”
“라벨 두 장 미리 써 놨어요?”
“네. 분석 쪽하고 보존 쪽이요.”
“톱 켜고 나서 쓰면 안 돼요. 켜고 나서는 손이 톱에 가 있어야 해요.”
톱은 3분 40초 만에 1미터를 지났다. 날 밑 가루받이 트레이에 흰 가루가 한 줌쯤 쌓였다.
경옥은 두 반쪽을 꺼내 톱대 옆 선반에 올려놓고, 캘리퍼로 각각의 폭을 쟀다.
한쪽이 48.9밀리, 한쪽이 49.4밀리였다. 합이 98.3이었다.
자르기 전 통의 폭은 어제 재 놓은 것이 99.95밀리였다.
“…1.65예요.”
은재가 말했다.
“네.”
“1.4라고 적었는데요.”
계획서에는 커프 1.4밀리라고 적혀 있었다. 그 1.4는 톱날 두께였다. 지난달에 날을 사면서 상자에 적힌 수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었고, 아무도 그걸 의심하지 않았다.
경옥이 톱날을 세워서 손가락으로 톱니를 훑었다.
“톱니가 좌우로 조금씩 벌어져 있어요.”
”…일부러요?”
“일부러요. 안 벌려 놓으면 톱몸이 낸 홈에 톱몸이 끼어요. 벌려 놓으니까 홈이 톱몸보다 넓어요.”
“그러면 날 두께로는 홈 폭을 모르는 거예요?”
“모르죠. 날은 잴 수 있고 홈은 자르고 나서야 재요.”
은재가 야장을 펴서 9월 28일 줄을 찾았다. 커프를 반씩 나눠 적지 않고 분석 쪽 한 몫으로 다 적기로 정한 줄이었다. 그 줄에 1.4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면 0.25가요.”
“어디에도 없었어요.”
경옥이 말했다.
“분석 쪽에 1.4를 적고 보존 쪽에 온전한 폭을 적으면, 두 쪽을 합쳐서 99.95가 되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는 98.3이에요. 1.65가 없어졌는데 1.4만 적혔어요.”
“나머지는 없는 거로요.”
“없는 거로요. 통 하나에 0.25씩이에요. 스무 통이면 5밀리예요.”
경옥은 지우지 않고 오늘 날짜로 그 옆에 적었다.
「10/2. 커프 1.4는 날 두께임. 실측 커프 1.65(통 1번, 자르기 전 99.95 / 반쪽 48.9+49.4=98.3). 1.4로 정한 기준 철회. 통마다 실측해서 적음. 날 갈거나 바꾸면 다시 잼.
날 두께를 커프로 적은 것은 잰 것을 적은 게 아니고 상자에 적힌 것을 적은 것임.」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절단면에 손등을 대 보면 매끄러웠다. 얼음은 톱이 지나가는 동안 마찰로 아주 얇게 녹고, 톱이 지나간 다음에 바로 다시 얼었다. 그 몇 밀리는 한 번 물이 되었다가 얼음이 된 얼음이었다.
“이 면은 시료가 아니에요.”
경옥이 말했다.
“깎아 내야 해요?”
“깎아요. 대패로 얇게요. 그것도 없어지는 폭이에요.”
은재는 그 줄을 받아 적으면서 처음에 적으려던 문장을 고쳐 적었다.
「없어지는 폭이 하나가 아님. ①톱 홈 1.65 ②절단면 대패 몫(양쪽 각각). 둘을 합쳐야 「없어진 것」임. 지금까지 ①만 세었고 ②는 아예 칸이 없었음.」
4. 구멍
하람은 점심때 어머니 집에 갔다. 쉰넷째였다.
아침에 제비를 뽑았다. 셋째 블록 셋째 장은 「손」이었다.
냉장고에 종이 두 장이 8시 반 것으로 붙어 있었다. 아홉째였다.
어머니는 창가 의자에 앉아 계셨고 무릎에 감색 천이 놓여 있었다. 이틀 전에 분필로 표시만 해 놓고 안 뚫은 단추구멍 자리였다.
오늘은 그 자리 주위에 촘촘한 박음질이 둘러져 있었다. 구멍은 아직 없었다.
“오늘 뚫어요?”
“뚫어.”
미강은 쪽가위를 집어 들고 천을 손바닥에 펴서 얹으셨다.
“왜 오늘이에요?”
“박아 놨으니까.”
“그게요?”
“박아 놓고 갈라야 해. 그냥 가르면 올이 풀려. 여기 실이 올을 붙들고 있잖아.”
미강은 박음질 안쪽 가운데에 가위 끝을 넣어 한 번에 갈랐다. 천이 벌어지면서 구멍이 되었다.
“됐어요?”
“아직. 이제 감쳐야 해. 감쳐야 안 늘어나.”
하람은 수첩을 무릎에 놓고 적었다.
「10월 2일. 단추구멍. 이틀 전 분필로 자리만. 오늘 자리 주위를 먼저 촘촘히 박고 그다음에 가운데를 가르셨음. 「박아 놓고 갈라야 한다. 그냥 가르면 풀린다.」 가른 뒤에 감치셨음.」
“이거 길이는 어떻게 정해요?”
하람이 물었다. 미강은 단추 하나를 집어서 세우더니 천 위에 굴려 보이셨다.
“눕혀서 재면 안 들어가. 세워서 굴려야 해. 단추가 지나갈 때는 서서 지나가니까.”
“두께까지 들어가는 거네요.”
“지름하고 두께하고. 그러고 조금 더.”
하람은 그것도 적었다. 적으면서 이틀 전 줄이 눈에 들어왔다. 구멍은 맨 나중이라고 하셨던 줄, 안 한 것과 나중에 할 것은 다르다고 두 번 말씀하셨던 줄이었다.
오늘 그 줄의 뒷부분이 왔다. 맨 나중이라는 것은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순서가 나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순서가 나중인 이유가 있었다. 구멍은 한 번 내면 못 메우니까 맨 나중이었다.
“어머니, 잘못 자르면요.”
“못 메워.”
미강이 실을 끊으셨다.
“실은 풀면 되고 구멍은 안 돼.”
하람은 그 말을 그대로 적었다.
오늘 짐작은 다섯이었다. 「본 것」 병기 사흘째였고, 본 것이 없는 짐작은 오늘 둘이었다. 어제 하나였고 오늘 둘이었다.
하람은 어제 옆에 적어 둔 줄 아래에 한 줄을 더 붙였다.
「10월 2일. 본 것 없는 짐작 둘. 어제 하나, 오늘 둘. 늘고 있음. 두 점임. 줄 아님. 셋째 점까지 셈만 함.」
최영숙이 지나갔다. 마흔다섯 번째였다. 오늘 뽑힌 장은 「손」이었으므로 발소리 줄은 짧게 두고 손 줄을 길게 적어야 했다.
하람은 어머니 손을 봤다. 가위를 쥔 손이 아니라 천을 누르고 있는 왼손을 봤다. 검지와 중지로 박음질 바로 옆을 눌러 천이 안 밀리게 하고 계셨다. 아무도 그 손을 시키지 않았다.
「10월 2일. 손. 오른손이 가위. 왼손이 박음질 옆을 누름. 누르는 자리가 정확히 자를 자리 옆임. 누르는 걸 보고 자를 자리를 알 수 있음. 자르는 손보다 누르는 손이 먼저 자리에 감.」
손잡이는 스물넷째였다. 잡으셨다. 바늘 6은 열흘째였고 실패 11은 열엿새째였다.
장기요양 조사표는 어제 적어 둔 대로 「나중에 옮길 것. 10월 15일.」이었다. 오늘은 안 건드렸다.
나오면서 감색 천을 봤다. 구멍은 하나였고 감침은 반쯤 되어 있었다.
5. 굽기 전에
정한은 2번 조각부터 쟀다.
0.11이었다.
표가 네 점이 되었다. 뗀 직후 0.38, 30분 0.24, 하루 0.16, 이틀 0.11이었다.
줄어든 몫은 0.14, 0.08, 0.05였다. 절반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30분에서 하루로, 하루에서 이틀 너머로 자꾸 길어졌다.
3번 조각도 쟀다. 어제 떼서 0.41, 30분 0.26을 적어 두었고 오늘이 하루 값이었다.
0.19였다.
정한은 세 조각의 하루 값을 나란히 적었다.
「1번 0.15 / 2번 0.16 / 3번 0.19.」
세 수는 한 줄에 못 앉았다. 조각이 서로 다른 물건이라서 표를 끊었으니, 끊어 놓고 세 값을 한 줄에 놓으면 끊은 이유가 없어졌다.
「줄이 셋임. 1번 줄은 끝났고 점이 스물넷임. 2번 줄은 점이 넷임. 3번 줄은 점이 셋임. 셋을 견줄 수는 있고 한 줄에는 못 놓음.
그런데 셋 다 0.15에서 0.19 사이임. 이건 견준 것임. 잰 것 아님.」
4번 조각은 오늘 걸었다. 여섯까지였고 넷이 되었다.
정한은 그다음에 벽에 붙여 놓은 달력을 봤다. 10월 6일에 동그라미가 하나 있었다. 본물건을 굽는 날이었다. 본물건은 오늘로 아흐레째였고 나흘 남았다.
굽는 것은 한 번이었다. 물러진 테이프의 바인더가 습기를 먹어 끈적해진 것을 낮은 열에 오래 두어 물기를 몰아내는 일이었는데, 그 효과는 3주였고 3주 안에 옮겨야 했다. 다시 구울 수는 있었지만 굽는 횟수가 그대로 남았다.
정한은 새 종이를 꺼내서 맨 위에 적었다.
「굽기 전에 해 놓을 것.」
그 아래에 줄을 세웠다.
「1. 릴 지름·감긴 방향·층 옆면 사진(굽고 나면 감긴 모양이 달라짐). 2. 늘어남 표 — 2·3·4번 조각으로 하루·이틀 값 확보. 굽고 난 본물건은 이 표에 못 넣음(같은 물건 아님). 3. 헤드 소자, 시험 테이프로 속도 교정, 콘센트 험 1시간 녹음. 4. 사본 받을 판·매체 세 벌 미리 준비. 5. 굽는 동안 못 하는 일 목록.」
마지막 줄을 적고 나서 정한은 그 줄을 한 번 더 봤다. 굽는 이틀 동안은 그 릴로 아무것도 못 했다. 어제 조각을 하루 엇갈려 걸면서 알게 된 것과 같은 말이었다. 기다리는 동안에는 시작을 못 했다.
그래서 기다리기 전에 해 놓는 것이었다.
짐작 칸에는 여섯째 점이 왔다. 8시 15분에 「10시 45분」이라고 적고, 이유 칸에는 「어제 값 옮김」이라고 적었다.
손은 10시 33분에 갔다.
차가 −12분이었다. 방법 B로 네 점이 되어 +30, −75, +12, −12였다.
정한은 네 수를 보고 적었다.
「위, 아래, 위, 아래. 네 점 다 방향이 다름. 여섯 점까지 이런 식이면 흔들림으로 적음. 열 점까지 감. 여섯 점 남음.」
안 보는 날 둘째였다. 다음 판독은 10월 10일이었다.
6. 회색
셋째 통은 오후 2시에 톱대에 올렸다.
496.3미터 통이었다. 8월에 절단 전에 낮은 각도 조명으로 회색 띠를 찾아낸 통이었고, 두께 2밀리였고, 절단선을 띠에서 3센티 비켜 그어 놓은 통이었다.
톱이 그 깊이를 지날 때 소리가 한 번 달라졌다. 아주 잠깐이었다.
경옥이 톱을 멈추고 가루받이 트레이를 봤다.
흰 가루 위에 회색이 한 줄 얹혀 있었다.
은재가 트레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거 재예요?”
“재예요.”
“이건 어느 쪽 몫이에요? 분석 쪽이에요, 보존 쪽이에요?”
경옥은 대답하지 않고 트레이를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들었다.
“어느 쪽도 아니에요.”
”…없어진 거요.”
“없어진 거예요. 홈 폭에 들어간 거예요.”
1.65밀리였다. 통마다 1.65밀리씩 없어지고 있었고, 그게 여태 흰 가루라서 아무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오늘 그 1.65밀리 안에 화산재가 들어 있었다.
은재가 일어섰다.
“선생님, 이거 버려요?”
”…”
“지금까지 버렸어요?”
“버렸어요.”
경옥이 트레이를 작업대에 내려놓았다.
“쓸어서 버렸어요. 23년 동안요.”
둘 다 잠깐 아무 말도 안 했다.
경옥은 빈 시료병을 하나 가져와서 트레이의 가루를 옮겨 담았다. 병에 라벨을 붙이고 적었다.
「10/2. 통 3번(496.3m) 세로 절단 가루. 톱 홈 몫. 회색 띠 통과분 포함. 깊이 못 가름(홈 폭 1.65mm 전체가 섞임). 분석 쪽 아님. 보존 쪽 아님. 셋째 쪽임.」
은재가 라벨을 보다가 물었다.
“셋째 쪽이요?”
“쪽이 둘인 줄 알았는데 셋이에요. 자르면 둘이 되는 게 아니라 둘하고 가루가 돼요.”
“이거 쓸 수 있어요?”
“몰라요. 깊이가 안 갈리니까 층은 못 세요. 성분은 될 수도 있어요. 유리 알갱이는 어디서 왔는지가 알갱이에 적혀 있으니까요.”
경옥은 병을 선반에 올려놓고 오늘부터의 규칙을 적었다.
「절단 가루: 통마다 따로 받아 병에 담고 통 번호·깊이 범위·날짜를 적음. 안 쓸 수도 있음. 쓸 데가 생겼을 때 없으면 못 만듦.」
세 통은 다 잘렸다. 실금이 많은 통들이었는데 톱질 중에 갈라진 것은 없었다.
은재가 첫 통의 절단면을 오랫동안 봤다. 안쪽에 아주 작은 기포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실금 몇 개가 흰 선으로 지나갔다. 365일 전에 인양해서 상자에 넣고 문을 닫은 뒤로 아무도 그 안을 본 적이 없었다.
“안 깨졌어요.”
은재가 말했다.
“네.”
“그러면 365일이 맞았던 거예요?”
경옥이 장갑을 벗으면서 대답했다.
“안 깨진 건 봤어요. 하루가 맞았는지는 안 봤어요.”
”…”
“360일에 자르면 깨졌을지도 모르고 안 깨졌을지도 몰라요. 370일이면 더 나았을지도 몰라요. 우리는 365일에 한 번 잘랐어요. 그게 다예요.”
은재는 계획서 맨 아래에 적었다.
「10월 2일. 세 통 절단. 갈라짐 없음. 365일이 맞았다는 뜻은 아님. 365일로 한 번 해서 안 깨졌다는 뜻임. 점 하나임.」
방을 나오기 전에 은재가 톱대를 한 번 봤다. 날 밑은 비어 있었고 트레이는 씻어서 뒤집어 놓았다. 내일은 뒷정리였다.
남극에서는 0초의 눈금이 없었다. 케이블이 늘기 시작한 시각은 있는데 늘기 전의 값은 없었다. 그래서 30초는 옳은 자리가 아니라 고른 자리였다. 고를 수밖에 없는 자리도 있었다.
톱날은 1.4밀리였고 없어진 폭은 1.65밀리였다. 잰 것은 날이었고 없어진 것은 길이었다. 날은 자르기 전에 잴 수 있고 길은 자르고 나서야 재였다.
미강은 자를 자리를 먼저 박아 놓고 갈랐다. 그냥 가르면 풀렸다. 자르는 일의 대부분은 자르기 전에 하는 일이었다. 정한이 굽기 전에 해 둘 것을 적은 것도 같은 일이었다.
없어진 가루는 어느 쪽 몫도 아니었다. 그런데 받아서 병에 담으면 셋째 쪽이 되었다. 쓸 데가 생겼을 때 없으면 못 만드는 것이었다.
기다린 것은 되돌릴 수 있었다. 하루 더 기다리면 되었다.
자른 것은 안 되었다.
그래서 자르는 날에는 아무것도 새로 정하지 않고, 어제까지 정해 놓은 것을 그대로 했다.
세 통은 안 깨졌다. 그것은 하루가 맞았다는 뜻이 아니고, 한 번 해서 안 깨졌다는 뜻이었다.
점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