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의 새벽] 제145화 - 굳힘

제145화 「굳힘」
1. 되돌릴 수 없는 것
하루.
발사장에는 아침부터 사람이 없었다. 어제까지 19명이 앉아 있던 회의실은 비었고, 발사대 반경 2킬로미터 안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후 2시부터 추진제를 채우기 때문이었다.
명호는 통제실 창가에 서서 흰 김이 발사체 옆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액체산소는 영하 183도였다. 그것이 탱크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20미터짜리 금속 통은 조금씩 짧아진다. 쇠는 차가워지면 줄어들고, 그 줄어드는 길이가 손가락 한 마디가 아니라 손바닥 너비만 했다.
“배관을 저렇게 헐겁게 잡아 놓는 게 맞습니까?”
옆에 선 인턴이 물었다. 어제 호명식에서 눈을 크게 떴던 그 사람이었다.
“단단히 잡으면 부러져.”
명호가 말했다.
“통이 줄어드는데 배관만 제자리에 붙어 있으면, 줄어드는 힘이 전부 이음매 한 군데로 몰려. 그러니까 오늘은 일부러 헐겁게 두는 거야. 채워지고 나면 저절로 팽팽해져.”
“채우고 나서 문제가 생기면요?”
“비우고, 말리고, 다시 채우는 데 이틀.”
명호가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 2시부터는 우리가 뭘 결정하는 시간이 아니야. 이미 결정된 걸 따라가는 시간이지.”
11시에 마지막 기상 브리핑이 있었다. 기상 담당관이 화면 3장을 띄웠다. 지상풍, 상층풍, 그리고 구름.
“내일 아침 지상풍은 문제없습니다. 상층풍이 조금 셉니다. 고도 11킬로미터 부근에서 초속 65미터입니다.”
담당관이 말했다.
“발사체가 제일 심하게 눌리는 구간이 딱 거깁니다. 소리보다 조금 느린 속도로 올라가는데 옆에서 그만큼 밀면, 몸통이 바람을 비스듬히 맞게 됩니다. 그 각도가 커지면 눌리는 힘이 몇 배로 뜁니다.”
“넘습니까, 안 넘습니까.”
팀장이 물었다.
“규정 안입니다. 한계가 초속 칠십이고 예보가 육십오니까, 5미터 여유가 남습니다. 다만 이건 예보값이고, 내일 새벽 3시에 기구를 세 번 띄워서 실제로 잰 값을 다시 넣습니다. 잰 값으로 비행 경로를 하루치 다시 계산해서 올려 줄 겁니다.”
“바람에 맞춰서 길을 고친다는 겁니까?”
인턴이 물었다.
“그래. 바람은 우리가 못 고치니까.”
담당관이 말했다.
“대신 그 바람 속을 어떻게 지나갈지는 고칠 수 있어. 어제 계산해 둔 길로 그냥 가면 몸통이 바람을 정면으로 받는데, 새벽에 잰 값을 넣어서 길을 살짝 눕히면 바람하고 나란해져. 같은 바람인데 눌리는 힘이 삼분의 이로 줄어.”
마지막 장은 구름이었다.
“내일 아침 발사장 서쪽에 층적운이 깔립니다. 뇌우는 없습니다. 예보에도 없고 레이더에도 없습니다.”
담당관이 잠깐 멈췄다.
“그런데 이건 규정상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번개가 치고 있느냐를 보는 게 아니라, 번개가 만들어질 재료가 있느냐를 봅니다.”
“차이가 뭡니까.”
인턴이 물었다.
“구름 안에 전기가 갈라져 쌓여 있는데 아직 터지지 않은 상태가 있어. 방아쇠가 없어서 안 터지는 거야.”
담당관이 말했다.
“발사체가 그 사이를 지나가면 방아쇠가 생겨. 몸통이 길쭉한 금속인 데다 뒤로 뿜는 불기둥이 전기를 잘 통하거든. 하늘에 갑자기 수백 미터짜리 전선 한 가닥이 지나가는 셈이야. 없던 번개가 그때 생겨.”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까?”
“달에 두 번째로 갔던 배가 이륙하고 36초 만에 두 번 맞았어. 하늘에는 그날 번개가 한 번도 안 쳤고.”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때 뒷줄에서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유도 계통 담당이었다.
“벽에 붙은 종이 말인데요.”
담당이 말했다. 벽에는 발사 제한 조건 23줄이 적힌 종이가 석 달째 붙어 있었다. 그 방에서 제일 오래된 종이였다.
“일곱 번째 줄, 상층풍 한계 초속 칠십입니다. 이거 석 달 전에 정한 거고, 그때는 이렇게 셀 줄 몰랐습니다. 여유가 5미터밖에 안 남습니다. 새벽에 잰 값이 예보보다 조금만 세게 나오면 그냥 걸립니다.”
“그래서.”
“75로 넓히자는 건 아닙니다. 다만 칠십이라는 숫자에 근거가 얼마나 있는지 다시 보자는 겁니다. 몸통이 실제로 버티는 값은 더 위에 있는 걸로 압니다.”
팀장이 종이를 한참 보았다.
“버티는 값은 더 위에 있는 게 맞아.”
팀장이 말했다.
“그리고 자네 말이 다 맞아. 저 칠십에는 넉넉하게 잡아 둔 몫이 들어 있어. 오늘 오후에 앉아서 계산하면 칠십삼이나 74쯤 나올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안 고쳐.”
팀장이 말했다.
“숫자를 고치는 데는 10분이면 돼. 그 숫자가 다른 데를 어디까지 건드렸는지 확인하는 데는 사흘이 걸려. 저 일곱 번째 줄은 12번째 줄이랑 19번째 줄이 물고 있어. 그리고 그 값을 넣고 만든 비행 경로가 이미 배 안에 들어가 있고.”
팀장이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이게 더 중요한데.”
팀장이 말했다.
“규정을 넘을 것 같아서 규정을 넓히는 걸, 우리 일에서는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규정이 없는 거라고 불러.”
팀장이 말했다.
“저건 석 달 전의 우리가 쓴 거야. 그때 우리는 아무 데도 안 가고 싶었고 아무한테도 안 미안했어. 지금 우리는 내일 아침에 저걸 쏘고 싶어. 오늘 저 종이를 고치면, 우리가 고치는 게 아니라 가고 싶은 마음이 고치는 거야.”
“그럼 걸리면 못 갑니까.”
유도 담당이 물었다.
“못 가. 대신 그날은 우리가 못 간 거지 우리가 진 게 아니야.”
팀장이 종이 아래에 매직으로 날짜를 하나 더 적었다. 오늘 날짜였다. 고치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오후 2시에 충전이 시작되었다. 밸브가 열리는 소리는 통제실까지 들리지 않았고, 계기판의 숫자 하나가 영에서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명호는 그 숫자를 보면서, 이제 이 일이 어제와는 다른 종류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제까지는 고칠 수 있는 일이었다. 오늘부터는 지고 가는 일이었다.
3시에 발사 당일 시각표가 배포되었다. 종이로 나왔다.
“화면으로 주시면 안 됩니까.”
인턴이 물었다.
“화면은 꺼지면 없어져.”
명호가 말했다.
“내일 아침에 제일 먼저 안 되는 게 뭐일 것 같아? 화면이야. 늘 그래.”
2. 지님
ATLAS 통제실은 그날 84번째 격자 정렬을 마쳤다. 오차 0.1밀리미터. 고리는 79장이 되었고, 무중단 송전은 1608시간, 67일째로 접어들었다.
정렬이 끝나고 관제사가 기록란을 채우려 할 때 팀장이 물었다.
“지금 이 고리, 84번을 맞춰서 여기까지 왔지.”
“예.”
“그 84번 맞춘 값이 지금 어디 있어?”
관제사가 화면을 보았다.
“제어기 안에 있습니다. 거울마다 자기 보정값을 들고 있습니다.”
“전원이 한 번 끊기면?”
”…”
관제사가 잠깐 말이 없었다.
“다시 맞추면 됩니다.”
“84번을?”
팀장이 말했다.
“그것도 순서대로. 79장이 서로를 보고 맞춘 값이라 한 장만 먼저 맞출 수도 없어. 처음부터야. 두 달 반이 걸릴 거야. 그동안 지상은 어디서 전기를 받고?”
”…옮겨 적겠습니다.”
“오늘 그거 해.”
작업은 간단해 보였지만 간단하지 않았다. 관제사가 첫 번째 문제를 금방 찾아냈다.
“쓰는 동안에는 못 읽습니다.”
관제사가 말했다.
“그 저장 영역이 그렇습니다. 값을 새겨 넣는 동안에는 같은 칩에서 값을 읽어 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옮겨 적는 동안에는 정렬을 못 합니다. 거울이 눈을 감는 겁니다.”
“얼마나.”
“장당 2초, 79장이면 3분 좀 안 됩니다.”
“그림자 구간에 해.”
팀장이 말했다.
“어차피 지구 그림자에 들어가면 40분은 아무것도 못 맞춰. 그때 하면 돼.”
두 번째 문제는 그보다 사나웠다. 관제사가 새겨 넣는 절차를 짜다가 손을 멈췄다.
“팀장님, 쓰는 도중에 전원이 끊기면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되는데.”
“반만 쓰인 값이 남습니다.”
관제사가 말했다.
“그게 제일 나쁩니다. 값이 아예 없으면 제어기가 없는 줄 알고 처음부터 맞춥니다. 근데 반만 쓰인 값은 값처럼 생겼습니다. 제어기가 그걸 진짜 값으로 알고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84번 맞춘 자리인 줄 알고 엉뚱한 데서 출발합니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없는 것보다 나쁜 게 어긋난 채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지.”
팀장이 말했다. 언젠가 거울 한 장을 빼던 날에 했던 말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칸을 2개 씁니다.”
관제사가 말했다.
“지금 값이 들어 있는 칸은 손대지 않고, 옆의 빈 칸에 새 값을 다 씁니다. 다 쓰고 나서 마지막에 딱 한 글자만 바꿉니다. 어느 칸이 진짜인지 가리키는 글자입니다.”
“그 한 글자를 쓰다가 끊기면?”
“한 글자는 한 번에 쓰입니다. 쓰이거나 안 쓰이거나 둘 중 하나고 반쯤 쓰이지 않습니다. 안 쓰였으면 옛날 칸이 그대로 진짜로 남습니다. 83번째 값으로 깨어나는 겁니다. 그건 잃은 게 아닙니다.”
“좋아.”
팀장이 말했다.
“하나 더 넣어. 값만 적지 말고, 그 값이 어떤 날 나온 값인지도 같이 적어. 그날 판 온도, 태양 각도, 몇 차인지.”
“값만 있으면 부족합니까.”
“값만 있으면 그게 언제 맞는 값인지를 몰라.”
팀장이 말했다.
“석 달 뒤에 전원이 끊겨서 이 값을 다시 꺼내 쓴다고 쳐. 그때 판 온도가 지금보다 20도 높으면, 이 값은 맞는 값이 아니라 옛날에 맞았던 값이야. 조건을 같이 적어 두면 제어기가 그걸 보고 알아서 판단해. ‘이건 다른 날 값이니까 참고만 하고 다시 맞추자.’ 조건 없이 값만 적어 두면 무조건 믿어.”
그림자 구간에 접어들자 79장이 차례로 눈을 감았다. 2초씩. 3분이 좀 안 되어 전부 끝났고, 마지막에 가리키는 글자 하나가 바뀌었다. 화면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송전량도, 격자 오차도, 주파수도 어제와 똑같았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좋아졌습니다.”
관제사가 말했다.
“오늘 한 일은 좋아지는 일이 아니었어.”
팀장이 말했다.
“잃지 않게 하는 일이었지. 그건 잘해도 표가 안 나.”
지님이란 값을 손에 꽉 쥐고 놓지 않는 일이 아니다. 그 값에 이르기까지 84번 어긋나고 84번 다시 맞춘 시간을, 전원이 한 번 끊겨도 살아남는 자리에 옮겨 적어 두는 일이다. 기억은 저절로 남지 않는다. 남기려고 한 번 멈춰 선 것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 일을 한 날에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으므로, 그 일은 언제나 다른 급한 일에 밀린다. 밀리다가 어느 날 전원이 끊긴다.
3. 목이 펴진 자리
22일째였다. 물 주는 차례는 김지수였다.
진우가 창턱으로 가서 화분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어제 흙을 밀고 나온 싹은 목이 굽어 있었다. 고리처럼 구부러진 채로 등으로 흙을 밀고 나왔고, 노랗다기보다는 아예 하얀 쪽에 가까웠다. 그것이 하룻밤 사이에 목을 펴고 곧게 서 있었다. 끝에 붙어 있던 접힌 것 2장이 벌어져 있었고, 색이 초록이었다.
“하룻밤인데요.”
진우가 말했다.
“하룻밤이면 충분해요.”
김지수가 물뿌리개를 들고 와서 옆에 섰다.
“흙 속에서 자란 동안에는 얘가 빛을 한 번도 못 봤어요. 빛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그 상태에서는 딱 두 가지만 해요. 길게 자라는 거랑, 목 굽히고 있는 거.”
“잎은요.”
“안 만들어요. 흙 밑에서 잎을 만들어 봐야 쓸 데가 없으니까요. 초록색도 안 만들고요. 초록색 만드는 게 얘한테는 제일 비싼 일인데, 빛이 없는 데서 만들면 그냥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흙 밑에서 나온 싹은 다 하얗고 다 길쭉해요. 잘못 자란 게 아니라 그때까지는 그게 맞아요.”
“그러다 빛을 보면요.”
“몇 시간 만에 전부 바꿔요.”
김지수가 말했다.
“목을 펴고, 접었던 걸 벌리고, 초록색을 만들기 시작하고.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이게 제일 신기해요.”
“뭐요.”
“키 자라는 속도를 늦춰요.”
진우가 김지수를 보았다.
“빛을 봤으면 더 신나서 자라야 하는 거 아니에요?”
“빛을 못 봤을 때가 제일 급했던 거예요.”
김지수가 말했다.
“어딘지도 모르는 데를 향해서 가진 걸 다 써 가면서 뻗는 중이었잖아요. 도착하면 그럴 이유가 없어요. 이제부터는 천천히 자라면서 튼튼해지는 쪽으로 바꿔요. 어제까지가 제일 빨랐어요. 오늘부터가 제일 느려요.”
“느려지는 게 좋은 겁니까.”
“오늘부터가 진짜니까요.”
김지수가 흙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 물을 아주 조금만 주었다.
“그리고 한번 편 목은 다시 안 굽어요.”
“안 굽어요?”
“못 굽어요. 굽은 자리가 굳거든요. 물렁했을 때는 어느 쪽으로든 휠 수 있었는데, 펴지면서 그 자리가 단단해져요. 그래야 서 있을 수 있으니까요.”
김지수가 말했다.
“굳으면 이제 안 다쳐요. 대신 굳고 나면 지나온 데로는 못 돌아가요.”
진우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옆의 두 번째 씨앗은 아무것도 없었다. 22일째 흙이 그대로였다.
“얘는 안 나는 거죠.”
진우가 말했다. 어제는 파 보고 싶은 걸 참았는데, 오늘은 안 나는 거라고 정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건 아직 몰라요.”
김지수가 말했다.
“같은 날 심은 씨앗이 다 같은 날 나면 좋을 것 같죠. 근데 그러면 씨앗한테는 제일 위험해요.”
“왜요.”
“그날 밤에 서리가 한 번 내리면 다 죽으니까요.”
김지수가 말했다.
“그래서 씨앗은 일부러 흩어져서 깨어나요. 몇 개는 빨리 나고, 몇 개는 한참 있다 나고, 몇 개는 그해에 아예 안 나고 다음 해에 나요. 한 번에 다 걸지 않는 거예요. 이게 고장이 아니라 다른 계획이에요.”
“그럼 얘는 다음 해에 난다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안 날 수도 있어요.”
김지수가 물뿌리개를 내려놓았다.
“안 나면 그때 가서 알면 돼요. 지금 정하면, 정한 다음부터는 안 보게 되거든요.”
4. 끝을 데려오지 않는 밤
닷새째였다. 소율은 그날도 하루에 두 번, 30분씩만 앉았다.
2마디에서 시작한 것이 이제 8마디쯤 되어 있었다. 여전히 새 재료는 하나도 안 가져왔다. 그 2마디를 늘이고, 줄이고, 뒤집고, 다른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 앉은 지 20분쯤 지났을 때 소율은 처음으로 끝이 보이는 것을 느꼈다.
2마디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뒤집으면 곡이 닫혔다. 손이 이미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다.
소율은 그 자리에서 손을 내렸다.
“어.”
건반이 고개를 들었다.
“왜 안 해요. 방금 닫히는 데였잖아요.”
“알아요.”
소율이 말했다.
“저도 알았어요.”
“근데 왜요.”
“오늘 끝내면 오늘 밤에 잊어버려요.”
소율이 건반을 보았다.
“제가 예전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게 있어요. 공연 끝난 곡은 다음 날이면 하나도 생각이 안 나요. 근데 못 끝낸 곡은 몇 년이 지나도 자다가 튀어나와요. 잘 만든 쪽이 남는 게 아니라 안 끝난 쪽이 남아요.”
“그게 왜 그럴까요.”
기타가 물었다.
“머리가 끝난 일은 지운대요.”
소율이 말했다.
“자리를 비워야 하니까요. 안 끝난 일만 계속 들고 있어요. 손님이 계산하기 전까지는 뭘 시켰는지 다 외우는 식당 사람 있잖아요. 계산 끝난 순간에 싹 잊어버리는.”
“그럼 언제 끝내요?”
건반이 물었다.
“끝이 저한테 올 때요.”
소율이 말했다.
“오늘 끝냈으면 그건 제가 가서 데려온 끝이에요. 제가 만든 끝이지 얘 끝이 아니에요.”
“차이가 있어요?”
“있어요.”
소율이 손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제가 데려온 끝은, 그날 제 손이 어디까지 갈 수 있었는지에서 멈춰요. 그럼 딱 그만큼만 남아요. 지금 굳히면 지금만큼만 남는 거예요.”
“다음 달 회차에는요.”
기타가 물었다.
“안 올려요.”
소율이 말했다.
“지난주에도 그랬고 이번 주에도 그래요. 덜 익은 걸 무대에 올리면 그 자리에서 굳어요. 무대는 굳히는 데거든요.”
그날 밤 소율은 방에 돌아와 불을 켜지 않고 앉아 있었다. 8마디가 계속 굴러다녔다. 닫히지 않은 채로 굴러다녀서 성가셨고, 성가신 것이 좋았다. 성가시다는 건 아직 자기가 그걸 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5. 없어도 되게 됨
열하루째 되던 날 오전, 부장이 동현을 불렀다.
동현은 종이 2장을 챙겨서 갔다. 처리 건수 추이하고 되묻는 횟수 추이였다. 2주를 다 못 채우고 원래대로 돌리라는 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고, 그러면 사흘만 더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앉아.”
부장이 말했다.
“그거 뭐야.”
“숫자 가져왔습니다.”
동현이 종이를 내밀었다.
“건수는 마이너스 18에서 시작해서 지난주에 마이너스 칠까지 올라왔고, 이번 주에 플러스 사입니다. 시작하기 전보다 넘었습니다. 되묻는 횟수는 건당 2.2에서 0.3입니다.”
부장이 종이를 한 번 보고 내려놓았다.
“그만 세.”
”…예?”
“세는 거 그만하라고. 2주 채울 것도 없어.”
부장이 말했다.
“어제 3층 팀장이 나한테 뭘 물어보러 왔는데, 자네 얘기가 한 번도 안 나왔어. 10년 만에 처음이야.”
동현은 종이를 도로 접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합니까.”
“뭘 어떻게 해.”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부장이 동현을 잠깐 보았다.
“없어.”
부장이 말했다.
“그게 자네가 만든 거야.”
동현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앉아 있는데 뭔가 헐거웠다. 서운한 것하고는 달랐다. 서운한 건 지난주에 이미 한 번 겪었고 그때는 자기가 빠진 자리가 아팠는데, 오늘은 아픈 데가 없어서 이상했다.
오후에 후배가 와서 물었다.
“이제 원상 복구 얘기는 안 나오는 겁니까.”
“안 나올 거야.”
동현이 말했다.
“석 달만 이대로 두면 아무도 예전 방식을 기억 못 해. 그때는 되돌리고 싶어도 못 되돌려.”
“그게 좋은 겁니까.”
“좋은 거지.”
동현이 말했다.
“그런데 좀 무섭기도 해. 되돌릴 수 있을 때는 아직 안 정한 거잖아. 못 되돌리게 되면 그제야 정한 게 되고.”
“과장님, 근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후배가 말했다.
“인수인계 문서 그렇게 두껍게 써 놓으셨잖아요. 그거 저 사실 안 봤거든요. 다들 안 봤을걸요.”
“알아.”
동현이 웃었다.
“그거 쓰면서도 알았어. 인수인계는 문서로 안 넘어가. 저 사람이 나 없이 그 일을 몇 번 해 봤느냐로 넘어가. 10번 해 보면 넘어간 거고, 100페이지를 읽어도 한 번도 안 해 봤으면 안 넘어간 거야.”
동현은 서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위에 명찰이 4장 놓여 있었고 다섯째 자리가 비어 있었다. 어제 6층에 직접 가서 알아 온 이름이 있었다. 동현은 그 이름을 적어서 다섯째 자리에 놓았다.
5장이 다 찼다.
동현은 여섯째 자리를 비워 두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손수건을 접어 서랍에 도로 넣었다. 넣으면서, 이걸 다시 펼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흐름표에는 이렇게 적었다.
‘오늘 한 일: 없음.’
그리고 그 줄을 지우고 다시 적었다.
‘오늘 한 일: 없어도 되게 됨.’
6. 9시와 11시
현수의 문자는 오후 4시에 왔다.
‘9시에 갈게요. 아버지는 11시쯤 오세요. 11시 반에 관리사무소 앞에서 뵈면 될까요.’
진우는 그 문자를 세 번 읽고 종이를 꺼내 시각을 적었다. 9시. 11시. 11시 반. 다 적고 나니 그 3줄이 자기가 5년 동안 가진 것 중에 제일 구체적인 것이었다.
저녁에 김지수가 국을 데우는 동안 진우가 말했다.
“10시 반쯤 가 있을까 하는데요.”
“왜요.”
“멀리서요. 안 보이는 데서. 그냥 근처에 있고 싶어서요.”
김지수가 국자를 내려놓았다.
“그럼 아드님이 혼자 있는 2시간이 2시간이 아니게 돼요.”
“제가 안 보이는데요.”
“아버님이 안 계신 채로 혼자 있는 거랑, 아버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는 채로 혼자 있는 건 다른 거예요.”
김지수가 말했다.
“둘째 건 혼자가 아니에요. 계속 뒤를 보게 돼요. 5년 만에 어머님한테 할 말을 하려고 가는 자린데, 뒤를 보면서 하게 되면 그 말이 안 나와요.”
진우는 잠깐 아무 말도 안 했다.
“11시에 가겠습니다.”
“예.”
“그런데요.”
진우가 말했다.
“제가 그날 아침에는 이 마음이 아닐 것 같은데요. 9시부터 안절부절못할 것 같은데요.”
“그럴 거예요.”
김지수가 국을 옮겨 담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정해 두세요. 정하는 건 지금 하시고, 그날 아침에는 지키기만 하시고요.”
“그게 됩니까.”
“적어서 붙여 두면 돼요.”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붙여요?”
“서랍에 넣어 두시면 안 돼요. 서랍은 열어야 보이는데, 그날 아침에는 아버님이 그걸 안 여실 거예요.”
김지수가 말했다.
“보이는 데다 붙여 두세요. 그거 쓴 사람은 지금 아버님이잖아요. 지금 아버님은 멀쩡하세요. 그날 아침 아버님은 안 멀쩡하실 거고요. 멀쩡할 때 쓴 걸 안 멀쩡할 때 보라고 붙여 두는 거예요.”
밥을 먹고 김지수가 돌아간 뒤 진우는 서랍을 열었다.
5년을 세던 종이가 그대로 있었다. 앞면에 2줄, 뒷면은 비어 있었다. 며칠 전에 이걸 버릴까 잠깐 생각했었다.
진우는 그 종이를 꺼내서 앞면 2줄 아래에 시각 3개를 적었다.
9시. 11시. 11시 반.
그리고 뒷면은 그냥 비워 둔 채로 두었다. 아직도 뒷면은 아들 몫이었다.
진우는 종이를 서랍에 넣지 않았다. 부엌 벽 달력 옆에 붙였다. 붙이고 나서 한 발 물러서서 보았다. 5년을 세던 종이였고, 이제는 시각이 적힌 종이였다.
그날 밤 진우는 불을 끄고 누워서, 벽에 붙은 종이가 어둠 속에서도 거기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같은 시각, 발사장에서는 탱크가 팔 할까지 차 있었고 흰 김이 밤새 옆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명호는 통제실 의자에 기대 잠깐 눈을 감았다. 벽에는 23줄이 적힌 종이가 석 달째 그대로 붙어 있었고, 그 아래에 오늘 날짜가 하나 더 적혀 있었다.
궤도에서는 79장의 거울이 84번째 값을 제 안에 새겨 넣고 다시 눈을 떴다. 창턱에서는 하루 사이에 목을 편 싹이 더 이상 굽지 않았고, 옆 자리 흙은 22일째 아무 일도 없었다. 소율의 8마디는 닫히지 않은 채 밤새 굴러다녔고, 동현의 손수건은 5장이 다 찬 채로 서랍 안에 접혀 있었다.
굳는다는 것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자란 자리를 지고 가야 한다는 뜻이다. 무엇이든 처음에는 다 물렁하다. 물렁할 때는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고, 어느 쪽으로도 아직 가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굳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은 어딘가로 간 것이 된다.
그래서 굳히는 일은 언제나 조금 무섭다. 무서운 것이 맞다.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사람을 아무 데도 데려가지 못한다.
내일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