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의 새벽] 제144화 - 돋음

제144화 「돋음」
1. 마지막으로 묻는 자리
이틀. 엿새가 나흘 사이에 이틀이 되었다.
그 나흘 동안 통제실에서 일어난 일은 거의 없었다. 시각표에 적힌 대로 계통 하나하나가 제 순서에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고, 추진제를 채울 배관이 밤새 마른 질소로 씻겼고, 발사대 주변에서 사람이 하나씩 줄었다. 남은 것은 마지막으로 묻는 자리 하나였다.
회의실에는 19명이 앉았다. 앞자리에 팀장이 섰고, 벽에는 계통 이름이 세로로 죽 적혀 있었다.
“지금부터 한 사람씩 부릅니다.”
팀장이 말했다.
“자기 계통 이름이 불리면 고, 또는 노 고. 둘 중 하나만 말하세요. 아무 말도 안 하면 노 고로 적습니다.”
명호가 옆자리를 보았다. 처음 온 인턴이 눈을 크게 떴다.
“가만히 있으면 반대가 되는 겁니까?”
인턴이 작게 물었다.
“가만히 있는 걸 찬성으로 세면, 말하기 어려운 사람이 자동으로 찬성이 되니까.”
명호가 대답했다.
“입 다물고 있는 게 제일 편한데, 그 편한 쪽에 상을 주면 안 되거든.”
호명이 시작되었다. 추진, 고. 전기, 고. 구조, 고. 유도, 고. 지상 지원, 고. 목소리가 하나씩 짧게 떨어졌다. 12번째 이름에서 대답이 늦었다.
“3번 계통.”
팀장이 다시 불렀다.
“3번 계통.”
젊은 관제사가 일어섰다. 언젠가 가짜 이상 시험에서 4초 만에 노 고를 외쳤던 그 사람이었다.
“고입니다.”
관제사가 말했다.
“다만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3번 밸브 몸통 온도가 규정 아래쪽 끝에서 0.4도 떨어져 있습니다. 규정 안입니다. 안인데, 나흘 전에는 1.2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명호는 반사적으로 몸이 앞으로 나가려는 것을 눌렀다. 언젠가 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네가 뒤에 서 있으면 그 권한은 종이야. 명호는 등을 의자에 붙이고 그대로 있었다.
“규정 안이면 고 아닌가.”
누군가 말했다.
“고 맞습니다.”
관제사가 말했다.
“그런데 값이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있어서요. 오늘은 안이고 모레도 안일 겁니다. 계산으로는 그렇습니다. 계산이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팀장이 벽으로 돌아섰다. 3번 계통 옆에 고라고 쓰고, 그 옆에 별표를 하나 붙였다.
“고로 적고, 감시 항목에 올립니다. 발사 당일 시각표에 이 값을 읽는 칸을 따로 넣으세요. 읽는 사람 이름도 적고.”
팀장이 관제사를 보았다.
“자네가 읽어.”
“예.”
호명이 끝나고 19개의 고가 벽에 다 붙었을 때, 팀장이 마지막으로 종이 한 장을 꺼내 흔들었다.
“이건 석 달 전에 쓴 겁니다. 바람은 몇까지, 구름은 어디까지, 배는 어디 밖으로. 숫자가 23줄 적혀 있고, 하나라도 넘으면 안 갑니다. 모레 아침에 이 숫자를 고치자는 말이 나올 겁니다. 반드시 나옵니다.”
팀장이 종이를 벽에 붙였다.
“그때 이 종이를 보세요. 이건 우리가 제일 멀쩡할 때 쓴 겁니다. 모레 아침의 우리보다 석 달 전의 우리가 더 똑똑해요. 그날은 다들 가고 싶어서 눈이 멀어 있을 테니까.”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명호는 벽에 붙은 23줄을 오래 보았다. 판단을 그날 하지 않으려고 미리 해 둔 판단이었다. 가장 판단이 흐려질 순간을 미리 알고, 멀쩡할 때 자기 손을 묶어 둔 것이었다.
복도에서 아까 그 관제사가 명호를 붙잡았다.
“괜히 말씀드렸나 싶습니다. 어차피 규정 안인데.”
“0.4도짜리 말을 지금 안 하면요.”
명호가 말했다.
“모레 아침에 그 값이 이상해졌을 때, 그때 처음 말해야 돼요. 그날은 아무도 안 들어요. 다들 올리려고 서 있으니까.”
관제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소리를 질렀는데 오늘은 손이 떨리더라고요.”
“소리 지르는 게 더 쉬워요.”
명호가 웃었다.
“이상 있을 때는 그냥 이상하다고 하면 되잖아요. 오늘 건 이상이 아니거든요. 이상이 아닌 걸 말하는 게 제일 어려워요.”
2. 나흘 만의 답
나흘째 저녁이었다.
진우는 그 나흘 동안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손이 하루에 몇 번씩 주머니로 갔다가 돌아왔고, 저녁마다 문장을 하나 썼다가 지웠다. 부담 갖지 마라, 안 와도 된다, 그날 비 온다더라. 다 지웠다. 지우고 나면 화면에는 나흘 전에 보낸 한 줄만 남아 있었다.
7시가 조금 넘어 진동이 왔다.
갈게요.
세 글자였다. 진우는 그 세 글자를 세 번 읽었다. 손이 조금 떨려서 화면을 다시 켜야 했다. 그리고 잠시 뒤, 밑에 한 줄이 더 붙었다.
근데 저 조금 일찍 가서 혼자 있다가, 아버지 오시면 그때 같이 있어도 돼요?
진우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처음 올라온 것은 기쁨이었는데, 두 번째 줄을 읽고 나자 그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왔다. 서운함이었다. 같이 가자고 한 말이었는데 따로 가겠다는 뜻이었다. 5시간 뒤에 만나자는 말과 뭐가 다른가 싶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물었을 것이다. 왜 따로 가려고 하느냐. 아빠랑 같이 가는 게 그렇게 싫으냐. 그 2줄이 목까지 올라왔다가 멈췄다.
진우는 대신 이렇게 보냈다.
그래. 네가 몇 시에 갈지만 알려 줘. 나는 그 뒤에 가마.
보내고 나서 그는 서랍을 열었다. 5년 동안 날짜를 세던 종이가 그대로 있었다. 반으로 접힌 자리가 닳아서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진우는 그것을 펴서 앞면을 보았다. 2줄이 그대로 있었다. 왔구나. 미안하다.
뒷면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오늘은 그 빈 면에 뭘 적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적을 게 없어서가 아니라, 적어 놓으면 그날 그 문장을 찾게 될 것 같아서였다.
진우는 종이를 도로 접어 서랍에 넣었다. 넣으면서 잠깐, 이걸 버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제 세지 않는 날짜였다.
그러나 손이 서랍을 닫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3. 2마디에서 자란 것
소율은 나흘 동안 하루에 두 번, 30분씩만 건반 앞에 앉았다.
열흘 만에 오른손이 짚은 그 2마디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그 2마디 말고는 아무것도 새로 가져오지 않았다.
“오늘도 그거예요?”
세션이 문을 열고 물었다.
“나흘째 같은 걸 치시던데.”
“같은 거 아니에요.”
소율이 말했다.
“들어 볼래요?”
소율이 2마디를 쳤다. 그리고 같은 2마디를 반으로 느리게 늘려 쳤다. 그러자 성급하게 들리던 것이 무거워졌다. 다시 2배로 빠르게 쳤다. 이번에는 같은 음들이 종종거리며 뛰어다녔다. 위아래를 뒤집어 쳤다. 올라가던 자리가 내려갔고, 그러자 처음 것과 형제처럼 닮았는데 표정이 완전히 다른 소절이 나왔다.
“이게 다 그 2마디예요?”
세션이 물었다.
“음은 하나도 안 늘었어요.”
소율이 말했다.
“늘리고 줄이고 뒤집기만 했어요.”
새 재료를 찾는 일과 있는 재료를 파는 일은 다르다. 대개 막히면 재료가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밖으로 나가 새것을 찾는다. 그러면 곡 안에 서로 남남인 조각이 늘어나고, 듣는 사람은 그것들을 하나로 묶을 이유를 못 찾는다. 반대로 하나의 짧은 씨앗을 늘이고 줄이고 뒤집어서 곡 전체를 짓는 방법이 있다. 그렇게 지으면 처음 듣는 사람도 어딘가 아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들었던 2마디가 옷만 갈아입고 계속 지나가는 것이다.
“근데 아직 2마디잖아요.”
세션이 말했다.
“곡이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2마디면 많아요.”
소율이 손을 무릎에 놓았다.
“그동안 저는 늘 재료가 모자란 줄 알았거든요. 근데 모자란 게 아니라 안 믿었던 거예요. 2마디가 나오면 이걸로 되겠나 싶어서 바로 다음 2마디를 찾으러 갔어요. 그러니까 매번 처음만 있고 가운데가 없었죠.”
“다음 달 남은 회차에 이거 올려요?”
“안 올려요.”
소율이 바로 대답했다.
“덜 익은 걸 무대에 올리면 그 자리에서 굳어요. 사람들 앞에서 한 번 통해 버리면 그 모양으로 끝나거든요. 이건 아직 어디로 갈지 저도 몰라요.”
세션이 나가고 소율은 다시 2마디를 쳤다. 나흘 전보다 이 2마디가 훨씬 낯익었다. 그런데 여전히 그다음이 어디인지는 몰랐다. 몰라도 조급하지 않았다. 나흘 동안 자란 것은 곡이 아니라, 몰라도 앉아 있을 수 있는 힘이었다.
4. 열흘째
부장이 다시 왔다. 이번에는 통계표 없이 빈손이었다.
“열흘 됐지.”
부장이 동현의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어떻게 됐나.”
동현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번 달 처리 건수는 지난달 대비 7퍼센트 하락이었다. 열흘 전에는 18퍼센트였다.
“올라오는 중입니다.”
동현이 말했다.
“되묻는 횟수는요.”
부장이 물었다.
“건당 0.6회입니다.”
동현이 두 번째 종이를 놓았다.
“열흘 전에 한 번 아래로 내려갔고, 이제 절반 밑입니다. 서류 두 건 중 한 건은 아무한테도 안 물어보고 그냥 처리됩니다.”
부장이 숫자를 보다가 짧게 웃었다.
“자네 요즘 한가하겠어.”
동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 말이 정확했다. 그리고 그 정확함이 사흘째 그를 조금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이틀 전에 6층 담당자가 3층에 직접 전화를 걸어 서류 두 건을 처리했다. 동현은 그 사실을 그날 저녁 흐름표를 정리하다가 알았다. 아무도 그에게 말하지 않았고, 말할 이유도 없었다. 10년 동안 그의 책상을 거치던 일이 그가 모르는 사이에 끝나 있었던 것이다.
“안 서운하세요?”
퇴근길에 후배가 물었다.
“선배 빼고 다 돌아가잖아요.”
“서운해.”
동현이 말했다.
“근데 이게 되라고 한 일이야.”
“그럼 그게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좋은 거지.”
동현이 잠깐 걸음을 멈췄다.
“내가 있어야만 돌아가는 걸 10년 동안 만들어 놨거든. 그게 실력인 줄 알았어. 근데 그건 내가 없으면 멈추는 거였어. 지금은 내가 없어도 돌아가. 서운한 거랑 잘못된 거는 다른 거야.”
그날 저녁 동현은 서랍을 열었다. 손수건 위에 명찰 4장이 놓여 있었다. 다섯 번째 자리는 열흘 전부터 비어 있었다.
동현은 새 명찰을 하나 꺼내 이름을 적으려다가 손을 멈췄다. 6층 담당자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10년을 같은 건물에서 지나쳤는데, 얼굴은 알고 부서와 자리는 아는데 이름을 몰랐다.
동현은 다음 날 아침 6층에 올라가 이름을 물었다. 상대가 좀 이상하다는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동현은 내려와서 다섯 번째 명찰에 그 이름을 적어 4장 옆에 놓았다. 그리고 흐름표 맨 아래에 적었다.
오늘 한 일, 이름 하나 알아냄.
5. 83차 정렬 — 메타 80단계 ‘가늠’
거울이 78장이 되었다.
이번에는 값이 나오기 전이었다. 관제실 화면은 조용했고, 격자 값은 아직 아무 데도 흐르지 않고 있었다.
“지금 미리 걸어 둡니다.”
팀장이 말했다.
“3시간 뒤 방향으로, 반대쪽에 미리.”
젊은 관제사가 손을 멈췄다.
“나흘 전에는 값이 나와도 손대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그랬지.”
팀장이 화면에 태양의 위치를 띄웠다.
“그럼 오늘 건 왜 미리 대는지 물어봐.”
빛에는 무게가 없지만 미는 힘은 있다. 거울 한 장이 햇빛에서 받는 힘은 손바닥에 종잇조각 하나 올려놓은 것보다 훨씬 작다. 그런데 그 힘은 쉬지 않는다. 78장이 하루 종일, 언제나 태양의 반대쪽으로 아주 조금씩 밀린다. 밀리는 방향은 제멋대로가 아니다. 태양이 어디에 있는지 알면 어느 쪽으로 얼마나 밀릴지 미리 계산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건 기다리면 없어지는 게 아닙니까.”
관제사가 말했다.
“안 없어져. 계속 같은 쪽으로만 밀거든.”
팀장이 말했다.
“나흘 전 건 앞뒤 온도가 평평해지면 저절로 돌아왔지. 저절로 돌아올 걸 사람이 먼저 손대면 2배로 틀어져. 오늘 건 저절로 안 돌아와. 그러니까 어긋난 뒤에 고치면 늘 어긋난 채로 산 시간이 남아.”
“둘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그게 이 일의 전부야.”
팀장이 조작반을 넘겨주었다.
“저절로 없어질 것에 손을 대면 흔들림을 자기가 만들고, 저절로 안 없어질 것을 기다리면 그만큼 늦어. 어느 쪽인지 가늠하는 게 기술이야. 값 보고 고치는 건 아무나 해. 값이 나오기 전에 어느 쪽으로 얼마나 나올지 알고 있는 게 진짜야.”
관제사가 3시간 뒤의 밀림을 계산해 반대쪽으로 미리 접어 넣었다. 3시간 뒤, 태양이 예상한 자리로 왔고 고리는 예상한 만큼 밀렸다. 그리고 미리 걸어 둔 만큼과 만나 상쇄되었다. 화면의 격자 값은 종일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하루였다.
격자 83차, 간격 0.1밀리미터. 송전 누적 1584시간, 66일째 끊김 없음.
기록에는 이렇게 남았다. 가늠이란 미래를 아는 일이 아니다. 저절로 풀릴 것과 저절로 풀리지 않을 것을 갈라 놓는 일이다. 기다림도 손씀도 그 자체로는 옳지 않다. 어느 쪽인지 알고 고르는 것만이 옳다.
6. 목을 굽히고 나오는 것
물주기는 진우 차례였다.
진우가 물뿌리개를 들고 화분 앞에 앉았다가, 그대로 굳었다.
“이거.”
진우가 말했다.
“이거 났는데요.”
김지수가 다가왔다. 나흘 전에 실금이 가 있던 흙 가장자리였다. 그 자리에 흙덩이가 조금 들려 있고, 그 아래에서 연한 것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열이레하고도 나흘, 스무하루 만이었다.
“목이 굽었네요.”
진우가 말했다.
“똑바로 안 서고 왜 이렇게 꺾여서 나왔어요? 어디 부러진 거 아닙니까.”
“일부러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김지수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자세히 보세요. 굽은 등이 위로 가 있고, 끝은 아래로 숨어 있죠.”
싹의 맨 끝에는 앞으로 이 식물이 될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잎도 줄기도 거기서 나온다. 그 끝을 머리처럼 앞세우고 흙을 뚫고 올라오면, 흙 알갱이와 돌 부스러기에 그것이 먼저 갈린다. 한 번 상하면 다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싹은 목을 고리처럼 굽혀서, 굽은 등으로 흙을 밀며 올라온다. 제일 여린 자리를 자기 몸 뒤에 숨기고 나온다. 그러다 흙 밖으로 나와 빛을 받으면, 그때 비로소 목을 편다.
“등으로 밀고 나오는 거예요.”
김지수가 말했다.
“제일 소중한 걸 뒤에 두고요. 곧게 서서 나오는 싹은 없어요.”
진우는 그 굽은 목을 한참 보았다. 그리고 옆을 보았다. 같이 심은 두 번째 씨앗 자리는 아직 아무 일도 없었다. 흙은 평평했다.
“이건요.”
“몰라요.”
김지수가 말했다.
“같이 심었다고 같이 나는 건 아니에요. 얘가 났다고 저것도 곧 난다는 뜻도 아니고요.”
“파 보고 싶은데요.”
“오늘은 더 참기 어려우시겠네요.”
김지수가 웃었다.
“하나가 나 버렸으니까요. 옆에 성공한 게 생기면 안 나온 쪽이 더 못 견디게 보여요.”
진우는 손을 무릎에 놓았다. 물은 아주 얇게 주었다.
한참 뒤에 그가 말했다.
“어제 아들한테 답이 왔어요.”
“뭐래요?”
“간대요.”
진우가 말했다.
“근데 저 없이 먼저 가서 혼자 있다가, 제가 가면 그때 같이 있겠답니다.”
김지수가 물뿌리개를 받아 내려놓았다.
“서운하셨어요?”
“조금요.”
진우가 솔직하게 말했다.
“같이 가자고 한 거였는데요.”
“아드님이 5년 동안 그날 못 간 거 아시죠.”
“압니다.”
“5년 만에 처음 가는 자리예요.”
김지수가 말했다.
“거기서 어머님한테 할 말이 있을 거예요. 그 말은 아버님 앞에서는 안 나와요. 아버님이 옆에 계시면 아드님은 아버님이 들어도 되는 말만 골라서 하게 돼요. 그러면 5년 만에 간 게 아무 소용이 없어져요.”
진우는 굽은 싹을 다시 보았다.
“그러니까 얘랑 같은 거네요.”
“예.”
김지수가 말했다.
“제일 여린 걸 뒤에 숨기고 나오는 거예요. 굽어서 나오는 게 약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렇게 안 나오면 다치니까 그런 거예요. 아드님이 굽혀서 나오는 중이에요. 다 나오면 목은 저절로 펴져요.”
“제가 뭘 하면 됩니까.”
“거기 계시면 돼요.”
김지수가 말했다.
“아드님이 정한 시각 뒤에요. 몇 시냐고 한 번만 물으시고, 왜 따로 가느냐고는 묻지 마세요. 지금 흙 파는 거랑 똑같아요.”
그날 밤, 발사장에서 명호는 마지막 순찰을 돌고 나오는 길에 걸음을 멈췄다.
발사체는 이틀 뒤에 떠날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배관에는 아직 아무것도 차 있지 않았고, 밸브들은 내일 새벽에 열릴 순서대로 잠겨 있었다. 벽에는 석 달 전에 쓴 23줄이 붙어 있었다. 다들 눈이 멀 그날을 위해, 멀쩡할 때 미리 묶어 둔 손이었다.
그 위로 고리가 지나갔다. 78장이 하루 종일 조금씩 밀렸다가, 미리 걸어 둔 만큼과 만나 제자리로 돌아온 뒤였다.
나오는 것은 언제나 굽은 모양으로 나온다. 스무하루를 흙 밑에서 보낸 싹도, 나흘을 붙들고 있다가 온 세 글자도, 열흘을 쉬고 나온 2마디도, 규정 안이라 말 안 해도 되는데 굳이 일어선 목소리도, 처음 밖으로 나올 때는 다 반듯하지 않았다. 굽은 것은 덜 자란 것이 아니라, 제일 여린 자리를 지키느라 그렇게 나온 것이었다.
펴지는 것은 그다음이었다.